존나게 쉬고 싶다

God rest my soul

사건사고(당시 신문기사) 100

정국은 사형 집행(1954년)

앞서 군재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정국은에 대한 형집행은 지난 18일 하오 3시 30분경 서울 근교에서 실시되었다. 그런데 정에 대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검찰당국에 명하여 모종의 조사를 진행시킨 바 있다고 하는데 지난 17일 서상환 법무부장관이 경무대를 방문하고 동 조사 보고를 함으로써 사형집행 보류가 해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에 대한 '총살형 집행'은 처음 예정일이던 거월(*지난달) 23일 상오 10시경부터 돌연 '보도관제'가 실시된 이래 국방부 관계자 일동이 함구 부언하고 일체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해옴으로써 항간에 구구한 억칙만을 퍼뜨려 주고 있다가 예정일부터 25일 후에 돌연 비공개리에 이루어지고 작일 하오 5시에야 비로소 공식 발표가 있었는데 이것은 보도 관제가 실시된 이래 꼭 27일째의 ..

오열사형집행 윤홍중 등 4명(1952년)

적귀에게 아부하여 군사기밀등을 탐지하고 애국지사들을 다수 투옥 학살하던 간첩단에 대한 사형 집행을 8일 하오 2시부터 서울시 교외 모처에서 집행하였다. 그런데 전기 간첩단은 윤홍중(52), 주계범(25), 김현수(27), 김달만(26)등 4명으로써 남로당에 가입하여 6.25 사변 당시 애국자들을 적도들에게 밀고하고 투옥 학살케 하였으며 그후 9.28에 북상하여 괴뢰집단의 간첩훈련을 받고 다시 남하하여 아군의 군 배치 상황 및 화력 등을 탐지하던 자들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52년 11월 10일

나병자에 사형집행(1949년)

어린 아해(*아이) 간을 먹으려다 사형 집행을 받은 나병환자 즉 본적을 군산부 동암동 274번지에 둔 김영례(30)이란 여자는 3년전에 다시 문둥병이 재발하여 고생하던차 작년 10월 10일 하오에 같은동리에 사는 이총하의 아들 이은선(5)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압사시킨 후 면도칼로 배를 갈러 간을 먹을랴고 하다가 자기 남편에 발각되어 군산서원에 피검되어 군산지청에서 사형언도를 받었든것이다. 그런데 피고가 불복상고함에 고등법원에서 다시 재심하였으나 역시 사형 언도를 나림에 피고는 또 이를 대법원에 상고한 바 있었으나 4월 25일 상고가 각하됨에 지난 7월 9일 법무장관 서명하에 14일 드디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받은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21일

폭도 12명 사형 집행(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 가담하였다하여 계엄지구 제1차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폭도 주모자 12명에 대한 사형집행은 예정보다 하로(*하루)늦게 지난 16일 하오 3시 광산군 지산면 게금산산록에서 군경 및 신문기자 입회하에 제5여단 사령부 군기대에의하야 집행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11월 19일

8명 사형 집행(1948년)

수인(囚人) 8명이 또 사형대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졌다. 즉 지난 27일 오후 서울형무소에서 살인강도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되었던 송칠성(32), 서병선(39), 김덕선(47), 송득용(29), 임수룡(24), 황한주(32), 전광석(29)등 7명과 동일 대구형무소에서 강대엽(27) 1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다. 이로써 해방후 남조선에서 사형이 진행된 사람은 39명에 달한다 한다 그리고 이날 사형 현장에는 구경하러 온 여자 2명이 입회하였다는데 이것은 조선 사형사에서 처음보는 일이어서 그 강한 심장에는 놀라지안을수 없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31일

파출소에 연행된 만취 피의자 경찰관들 뭇매에 숨져(1977년)

14일 하오 9시 25분쯤 서울중부경찰서 을지로 2가 파출소 안에서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다 연행돼온 고택용씨(35/종로구 와룡동 1)가 중부경찰서 형사 1반 김종서 순경(40)에게 옆구리를 차이는 등 폭행을 당해 쓰러져 국립의료원으로 옮겼으나 15일 상오 4시쯤 숨졌다. 숨진 고씨는 서울중구 수하동 중소기업은행본점 뒷골목에서 채무관계로 친구 신진환씨(29/영등포구 구로동 214-6)와 시비를 벌이다 신씨의 머리를 담벼락에 대고 구타하고 있다가 순찰중이던 동부경찰서 형사 1반 이정일 순경(33)과 조횡구 순경(40)등 2명의 경찰관에게 잡혀 파출소에 연행돼갔었다. 고씨가 파출소에 연행돼서도 계속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연행한 두 형사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누워 "빚을 받으려는 사람을 무엇때문에 잡아 왔느..

시어머니 때려 치사 "악덕 며느리 벌 주라" (1965년)

29일 하오 4시경 서울 답십리동 184 김안성(70) 노파는 그의 며느리 김옥순(37)씨의 학대로 매맞고 냉방에서 앓다가 죽었다고 동민들이 서울 청량리 경찰서에 며느리 김 여인을 처벌해달라고 고발해왔다. 김 노파는 슬하에 장남 신재호(45)씨와 차남 신흥호(42)씨 등 2명의 아들이 있으나 평소 서로 어머니 모시는것을 거부하여 김 노파는 이집 저집으로 떠돌아다니던 중 지난 23일 경기도 장호원의 큰아들집에서 작은아들 집으로 돌아오자 작은 며느리인 김 여인이 시어머니 김 노파에게 "왜 벌써 왔느냐?"고 욕설을 퍼부으며 가슴 등을 마구 구타, 김 노파는 김 여인집 뒷방에서 앓다가 29일 하오 3시 절명했다고 동민들이 고발해온것이다. 그런데 김 노파의 시체는 시립동부병원에서 해부중이며 경찰은 악덕며느리 김씨..

상관의 매 맞고 절명(1963년)

지난 3일 현역 육군 중위가 통근차 운행을 거부한 운전병(상병)을 '명령불복종'이라 하여 구타치사케 한 사건이 21일 사망자의 친형 김언수(36=경북 상주군 상주읍 서문동 46)씨에 의해 밝혀였다. 김씨에 의하면, 지난 3일 새벽 5시쯤 육군 제213 건설공병대대 식당앞에서 본부중대부관 이현식(29)중위가 통근차 '스리쿼터' 운전병 김태수(25)상병에게 "급한일로 차를 타고가야겠다"고 했으나 김상병은 "수송과장의 명령 없이는 통근차량을 운행할 수 없다"고 하자 주먹으로 구타, 졸도 사망케 한 것이라 한다. 김상병의 사인은 4일 제5육군병원에서 '뇌출혈'로 진단이 내렸고 시체는 5일 유족에게 인계, 부대안에서 간략한 장례식을 치르고 화장했다 한다. 가해자 이중위는 제17범죄수사대에 살인 혐의로 구속되어 군..

하급생 구타치사(1962년)

19일 상오 10시 10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과 4년 백영철(27-유도 3단)군은 동교 체육관 옆에서 같은 체육과 3년 김봉길(26-유도 3단)군을 차렷자세로 세워놓고 '선배 대우를 하지 않는다'고 구타하였는데 얻어맞은 김군은 현장에 쓰러졌다가 경북대학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운반도중 사망하였다. 학우 2명과 함께 쓰러진 김군을 동 병원으로 운반하였던 백군은 김군이 사망한 것을 알자 곧 대구서에 자수했는데 이에 대해 계철순 경북대학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우 유감된 일이다. 내가 알기에는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기합을 넣다가 죽인 것이 아니고 사감으로 때린 것으로 보인다. 조사해서 가해자에 대한 조치를 하겠다." -조선일보 1962년 7월 20일

국회 구내에서 테로(테러)행위(1956년)

15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14일 하오 의원휴게실에서 자유당 감찰부 차장 이정재씨가 김두한의원(헌정동지회, 이하 헌)을 협박한 사실이 발생하였는데 그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신분을 침해한 것으로 용허될수 없으니 그 진상을 조사규명하고 책임을 추궁하기 위하여 각 파 비율로 '국회구내 테러행위 진상조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소선규위원(민주당, 이하 민)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한편 김선태, 김상돈 양 의원(민)으로부터 김성주 사건의 처리 방안 보고의 천연을 위시하여 각종 의안의 의사일정의 배정이 졸렬하다고 운영위원장을 힐난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조 운영위원장이 선처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그런데 국회 구내 테러행위 진상조사문제는 양일동의원(헌)으로부터 의원이 공무집행중 의사당 구내에 10여..

김두한에 사형을 언도 15명은 20년 이상 종신징역(1948년)

한때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대한민청 김두한 등 16명에 관한 군률재판은 지난 2월 12일에 끝났으나 군사위원들은 그 판결 내용을 발표하지 않어 그 결과에 대하여 일반은 매우 궁굼히 생각하고있던바 하-지 중장은 15일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엿다. 군사위원들은 2명의 살해 폭동 사형(私刑) 기타 신체에 대한 고문을 감행한 피고들에게 유죄를 판결하여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 피고들에게 유죄판결을 하여 김두한등 14명에게는 교수형 문화태 등 2명에게는 종신형을 언도하였는데 하-지 중장은 이상 판결문과 증거사실을 재심한 후 다음과 같이 감형을 선언하였다. 교수형 = 김두한 종신 = 김영태, 신영균, 홍만길, 조희창 30년 = 박기영, 양동수, 임일택,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송창환, 고경주, 김관철 ..

법정서 김두한 할복을 기도(1948년)

대한민청 사건의 책임을 지겠다고 고백한 김두한이 법정에서 할복을 기도하였다. 대한민청 사건에 대한 군정재판은 12일도 속개되어 오전 9시부터 최후적인 검사의 논고가 시작되어 엄벌에 처해야 되겠다는 대목에 이르자 김두한은 군정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외치면서 몸에 감춰가지고 있던 깡통조각으로 배를 세번 그었다. 이에 재판정은 일시 혼란을 이루었는데 이미 폐정이 되고 말았다. 김의 상처는 약간 뱃가죽을 벗겨 피가 좀 났을뿐 대단치는 않은 모양이라 한다. 이 재판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지 또는 게속될것인지에 관하여서 판사측으로부터는 아모런 발언도 없어 알길이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으로써 재판은 끝났음으로 6명의 판사의 합의가 끝나는대로 하-지 중장의 결재를 기다려 수일내로 판결이 언도될 것이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