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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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졸기 6

금천부원군 박은의 졸기(1422년)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라났다.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 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여러 번 전임하여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임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할 때, 밖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치 성적이 제일이었으며, 좌보궐(左補闕)로 전임되었다가 태조 3년에 또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외람히도 어리..

익안대군 이방의의 졸기(1404년)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가 졸(卒)하였다. 이방의는 태조의 제3자요, 임금의 동모형(同母兄)이다. 개국(開國)·정사(定社)의 훈로(勳勞)에 참여하여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성질이 온후(溫厚)하고 화미(華美)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고, 손님이 이르면 술자리를 베풀어 문득 취하여도 시사(時事)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병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임금이 자주 그 집에 거둥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어 위로함이 심히 후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임금이 심히 애도하고 친림(親臨)하여 전(奠)을 베풀고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상등으로 예장(禮葬)하고, 시호(諡號)를 안양(安襄)이라 하였다. 아들은 이석근(李石根)이니, 익평 부원군(益平府院君)에..

청해군 이지란의 졸기(1402년)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이 죽었다. 이지란은 동북면(東北面)의 청주부(靑州府) 사람이다. 옛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다. 타고난 천성이 순후(純厚)한데다 무재(武才)가 있었다. 일찍부터 태상왕을 따라 정벌하는 싸움터에 나가 승첩(勝捷)하여 마침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태상왕이 이를 대접함에 특별히 두터이 하고, 또 정사 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을 주었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他國)에서 죽사온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德)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

문하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1392년)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太祖)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어육을 쓰지 않은 반찬)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성산)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경주 윤)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효령대군 이보의 졸기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가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보(𥙷)는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이미 관례(冠禮)하고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封)해졌다. 젊어서부터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일찍이 태종을 따라 평강(平康)에서 사냥하면서 다섯 번을 쏘아 다섯 번 다 맞추니, 위사(衛士)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편치않으므로 이보(李𥙷)가 몸소 탕약(湯藥)을 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태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비[臧獲]를 내려 주었다. 세종(世宗)께서 우애(友愛)가 지극히 도타와서 늘 그 집에 거둥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야 파(罷)하곤 하였..

좌의정 허조의 졸기

좌의정 허조(許稠)가 졸(卒)하였다. 허조는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데, 자(字)는 중통(仲通)이다.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뒤에 은문(恩門) 염정수(廉廷秀)가 사형을 당하였는데, 문생(門生)과 옛 부하이던 아전[故吏]들이 감히 가 보는 이가 없었는데, 조(稠)는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곽을 준비하여 장사지냈다. 경오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임신년에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시어 특별히 좌보궐(左補闕)을 제수하였고, 곧 봉상시 승(奉常寺丞)으로 옮겼다. 그때에 예제(禮制)가 산실(散失)되었었는데, 조(稠)가 전적(典籍)을 강구(講究)하여 힘써 고제(古制)에 따르게 하였고, 뒤에 잇따라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였는데, 무릇 치상(治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