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God rest my soul

조선왕조실록 26

금천부원군 박은의 졸기(1422년)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라났다.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 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여러 번 전임하여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임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할 때, 밖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치 성적이 제일이었으며, 좌보궐(左補闕)로 전임되었다가 태조 3년에 또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외람히도 어리..

익안대군 이방의의 졸기(1404년)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가 졸(卒)하였다. 이방의는 태조의 제3자요, 임금의 동모형(同母兄)이다. 개국(開國)·정사(定社)의 훈로(勳勞)에 참여하여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성질이 온후(溫厚)하고 화미(華美)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고, 손님이 이르면 술자리를 베풀어 문득 취하여도 시사(時事)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병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임금이 자주 그 집에 거둥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어 위로함이 심히 후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임금이 심히 애도하고 친림(親臨)하여 전(奠)을 베풀고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상등으로 예장(禮葬)하고, 시호(諡號)를 안양(安襄)이라 하였다. 아들은 이석근(李石根)이니, 익평 부원군(益平府院君)에..

청해군 이지란의 졸기(1402년)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이 죽었다. 이지란은 동북면(東北面)의 청주부(靑州府) 사람이다. 옛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다. 타고난 천성이 순후(純厚)한데다 무재(武才)가 있었다. 일찍부터 태상왕을 따라 정벌하는 싸움터에 나가 승첩(勝捷)하여 마침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태상왕이 이를 대접함에 특별히 두터이 하고, 또 정사 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을 주었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他國)에서 죽사온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德)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

문하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1392년)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太祖)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어육을 쓰지 않은 반찬)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성산)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경주 윤)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천추사 박신생이 칙서 세 통을 가지고 경사에서 돌아오다

천추사(千秋使) 박신생(朴信生)이 칙서 세 통을 싸서 받들고 경사에서 돌아왔다. 임금(세종)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세자(문종) 이하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서를 맞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그 첫째에 말하기를, "지금 목란하(木蘭河) 등 위(衛)의 야인 지휘(指揮) 올고리(兀苦里) 등이 아뢰기를, ‘근자에 라리(剌里) 지역에 가서 흑룡강의 칠성(七姓) 야인들이 송화강을 건너서 조선국에 가서 침노한다는 말을 들었다. ’고 하였다. 짐(朕:선덕제)이 생각하건대, 이 도적들이 간사하고 속이니 허위인지 사실인지의 여하는 알지 못하나, 이에 왕이 보내 온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특별히 왕에게 일러 알게 하는 것이니, 왕은 변방을 지키는 관원에게 경계하여 밤낮으로 마음을 써서 방비하여, 소홀한 ..

귀국하던 섬라곡 사신이 일본에서 약탈당하고 되돌아오다

섬라곡(暹羅斛:시암=태국)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작년 12월에 회례사(回禮使) 배후(裵厚)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약탈당하여 예물과 행장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칼과 갑옷과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태조)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곡 사람을 인도해서 반열(班列)에 나오게 하였다. 태조 3년(1394년) 7월 5일

청차 이일선이 군량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여 이에 따르다.

청차(淸差) 이일선(李一善)이 칙서를 가지고 나왔는데, 영의정 정태화 등이 상(효종)에게 교영(郊迎)할 것을 권하니, 승지 서원리(徐元履)도 그 말에 적극 찬동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나아가서 맞이하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대국(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羅禪:러시아)을 토벌하려는데, 군량이 매우 부족합니다. 본국에서도 군병을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국에서 다섯 달 치의 군량을 보내 주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는 어떠하오?" 하자 일선이 말하기를, "적병은 1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나, 저희들이 이처럼 달려오게 된 것은 북로(北路)에 비축한 것이 없음을 염려한 나머지, 내지(內地)의 곡물을 수송하여 군량을 이어대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청차 한거원이 서울로 들어오다.

청차(淸差)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효종)이 편전에서 접견할 적에 대신들도 역시 입시하였는데, 거원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바쳤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 백 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昂邦章)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러시아)을 정벌하되, 3월 초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 하였다. 거원이 자리를 피하여 절을 하자, 상이 위유하고 이어 차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하였다. 거원이 회자(回咨) 받기를 청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기를, "영장(領將)은 어떤 관원으로 정하여 보내야 하겠소?" 하니,..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한 기록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

징병 제찰사 이원익 등을 인견하고 격려한 뒤,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다.

상(선조)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와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 우부승지 신잡, 주서(注書)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경이 전에 안주(安州)를 다스릴 적에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들을 효유하여 인심을 수습하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니 경성(京城) 가까이 온다면 관서로 파천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경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니, 원익이 배사(拜辭)하고 물러갔다. 상이 또 최흥원(崔興源)에게 이르기를, "경이 해서 지방을 잘 다스렸으므로 지금까..

충주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파천을 의논하다

충주에서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선조)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入對)케하고 비로소 파천(播遷)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영중추부사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종묘와 원릉(園陵)이 모두 이곳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경성(京城)을 고수하여 외부의 원군(援軍)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승지 신잡(申磼)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수찬 박동현(朴東賢)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輦)을 멘 인부도 ..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다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제장(諸將)들은 모두 새재[鳥嶺]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입(砬)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은 포위를 뚫고 달천(㺚川)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