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God rest my soul

조선왕조실록 26

신립을 삼도 순변사에 제수하다.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에 제수하였다. 상(선조)이 친림하여 전송하면서 보검(寶劍)한 자루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이일(李鎰)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中外)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의 군기(軍器)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7일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 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당초에 수길이 매우 빈천하여 꼴[芻]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전(前) 관백(關白)이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

서청에서 환어사 등을 친국하다

왕(광해군)이 〈서청(西廳)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는데,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원임 대신 심희수(沈喜壽), 의금부 당상 박승종(朴承宗)·유공량(柳公亮)·조존세(趙存世)·정엽(鄭曄), 대사헌 송순(宋諄), 대사간 유숙(柳潚), 승지 이덕형(李德泂)·이춘원(李春元)·권진(權縉)·김지남(金止男)·신경락(申景洛), 사관 변삼근(卞三近)·이유달(李惟達)·유여항(柳汝恒)·한옥(韓玉), 가주서 이배원(李培元)이 입시하였다.〉 환어사(喚御史/임해군의 첩)에게 압슬형을 가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예숙(禮叔) 이하 환어사와 연루된 사람이 여덟 명이었는데 모두 국문에 불복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환어사에게 형을 더 가하라." 하니, 환어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청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환어사가 말하겠다는 것은..

태상왕이 연화방 신궁에서 훙하다

태상왕(태종)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태상왕이 별전에서 승하하시다

태상왕(太上王/태조)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항상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자면서 친히 진선(進膳)의 다소(多少)와 복약(服藥)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마땅함을 보살폈는데, 이날 새벽에 이르러 파루(罷漏)가 되자, 태상왕께서 담(痰)이 성(盛)하여 부축해 일어나 앉아서 소합향원(蘇合香元)을 자시었다. 병(病)이 급하매 임금이 도보(徒步)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태상이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상왕(上王/정종)이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오니, 임금(태종)이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으로 하여금 전(奠)을 주장하게..

태조의 상사를 조문하는 황제의 칙서와 부의

기보와 임관이 칙서(勅書)와 사부(賜賻)를 받들고 왕궁에 이르렀다. 백관 분사(百官分司)가 태평관에 나아가 앞에서 인도하고, 임금(태종)이 상장(喪杖)을 버리고 질(絰)을 벗고 최복(衰服)으로 대문 밖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정비(靜妃)의 곡위(哭位)를 경연청(經筵廳)에 베풀고 시녀(侍女)를 거느리고, 유장(帷帳)을 쳤다. 백관(百官)은 전정(殿庭)에 서립(序立)하였다. 사신이 정전(正殿)에 이르러 남향하여 서매, 임금이 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정전에 올라가 북향해 서서 사배(四拜)하고, 백관도 또한 사배하였다. 예(禮)가 끝나서 사신이 나가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문 밖까지 전송하였는데, 한결같이 의주(儀注)와 같이 하였다. 그 칙서(勅書)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 에게 칙(勅..

효령대군 이보의 졸기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가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보(𥙷)는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이미 관례(冠禮)하고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封)해졌다. 젊어서부터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일찍이 태종을 따라 평강(平康)에서 사냥하면서 다섯 번을 쏘아 다섯 번 다 맞추니, 위사(衛士)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편치않으므로 이보(李𥙷)가 몸소 탕약(湯藥)을 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태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비[臧獲]를 내려 주었다. 세종(世宗)께서 우애(友愛)가 지극히 도타와서 늘 그 집에 거둥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야 파(罷)하곤 하였..

심신·박기년·이정상·이지영 등 모반과 관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이정상(李禎祥)·이지영(李智英)·아지(阿只) 등은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역모를 꾀하였고, 충개(蟲介)와 춘월(春月)도 참여하여 아가지(阿加之)의 역모를 들었으니, 그 죄는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를 모두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명하여 춘월과 충개는 다만 장(杖) 1백 대에 영구히 변방 고을의 관비(官婢)로 소속시키고,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되, 연좌는 이개(李塏) 등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백관들을 군기감(軍器監) 앞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거열(車裂)하여서 두루 보이고 사흘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세조 2년(1456년) 6월 18일

백관을 모아 강상인을 거열하고 박습과 이관을 목베며, 친족들을 귀양보내다

상왕(태종)이 박은·조말생·이명덕·원숙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강상인과 이관은 죄가 중하니 지금 마땅히 죽일 것이요, 심정과 박습은 상인에 비하면 죄가 경한 듯하였다. 괴수(魁首) 심온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었다가 대질(對質)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그렇지 않으면 인심(人心)과 천의(天意)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박은이 아뢰기를, "대질시키고자 하신다면 상인만 남겨두고 세 사람은 형벌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심온의 범한 죄는 사실의 증거가 명백하니, 어찌 대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겨 두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반역을 함께 모의한 자는 수모자와 종범자를 분간하지 않는 법이오니, 어찌 차등(差等)이 있겠습니까." 고 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옥에서 곤란한..

김초가 의금부를 피해 달아나 숨었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아가다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종연(李宗衍)이 아뢰기를, "어젯밤에 신(臣)이 명을 받들고 김초(金軺)를 잡으러 갔더니, 김초가 이미 달아나 숨었습니다." 하니, 승정원에서 성문(城門)을 닫고 뒤쫓아 잡기를 청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김초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아갔다. 승정원에 명하여 국문(鞫問)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정승 및 왕자·왕손이 남의 아내나 첩을 장차 수없이 빼앗을 것이다.’ 하였는데, 너는 누가 남의 처나 아내를 빼앗은 것을 보았느냐? 이철견(李鐵堅)에게 말하기를, ‘발설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였는데, 무슨 말이냐? 어찌하여 한치의(韓致義)가 누이를 팔아서 관직을 받았다고 말하였느냐?" 하니, 김초가 대답하기를, "한치의는 정승의 아들이요 수빈(粹嬪)의 아우로서 신의 첩을 빼앗았으니, 사..

좌의정 허조의 졸기

좌의정 허조(許稠)가 졸(卒)하였다. 허조는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데, 자(字)는 중통(仲通)이다.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뒤에 은문(恩門) 염정수(廉廷秀)가 사형을 당하였는데, 문생(門生)과 옛 부하이던 아전[故吏]들이 감히 가 보는 이가 없었는데, 조(稠)는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곽을 준비하여 장사지냈다. 경오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임신년에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시어 특별히 좌보궐(左補闕)을 제수하였고, 곧 봉상시 승(奉常寺丞)으로 옮겼다. 그때에 예제(禮制)가 산실(散失)되었었는데, 조(稠)가 전적(典籍)을 강구(講究)하여 힘써 고제(古制)에 따르게 하였고, 뒤에 잇따라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였는데, 무릇 치상(治喪..

고 중추원 부사 구성우의 처 유씨를 주살하다

고(故)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구성우(具成祐)의 처 유씨(柳氏)를 주살(誅殺)하였다. 유씨가 처음에 김익달(金益達)에게 시집갔었는데, 익달이 장가든 지 사흘 만에 버리었다. 뒤에 구성우에게 시집갔는데, 구성우가 아들이 없이 죽었다. 유씨가 명복을 빈다고 성언(聲言)하고 승가사(僧伽寺)에 가서 중 신생(信生)과 사통(私通)하여, 신생이 때 없이 왕래하였다. 구성우의 종 소고미(小古未)와 계집종 영생(英生) 등이 엿보다가 잡으려 하니, 유씨가 신생과 공모하여 도리어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헌사(憲司)에서 유씨와 신생을 잡아 국문하고 주살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정종)이 말하기를, "범한 바가 크기는 하지만, 봄·여름은 만물이 생장하는 때라, 옛 법에도 죽이는 것을 꺼렸으니, 추분(秋分)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