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왕(太上王/태조)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항상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자면서 친히 진선(進膳)의 다소(多少)와 복약(服藥)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마땅함을 보살폈는데, 이날 새벽에 이르러 파루(罷漏)가 되자, 태상왕께서 담(痰)이 성(盛)하여 부축해 일어나 앉아서 소합향원(蘇合香元)을 자시었다.
병(病)이 급하매 임금이 도보(徒步)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태상이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상왕(上王/정종)이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오니, 임금(태종)이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으로 하여금 전(奠)을 주장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동한지(東漢志)》의 국휼고사(國恤故事)를 상고하면, ‘백관(百官)이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고리(故吏)·이천석(二千石)·자사(刺史)·경도(京都)에 머무르고 있는 각 지방의 상계 연리(上計掾吏)는 모두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천하(天下) 이민(吏民)은 발상(發喪)하여 3일을 임(臨)한다.’ 하였고,
또 대명(大明) 영락(永樂) 5년 7월 초4일 황후(皇后) 붕서(崩逝) 때의 예부 상례 방문(禮部喪禮榜文)을 상고하면, ‘경사(京師)에 있는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본월(本月) 초6일 아침에 각각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사선문(思善門) 밖에 다달아,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초8일 아침에 각 관원(官員)은 소복(素服)으로 띠[帶]와 효복(孝服)을 가지고 우순문(右順門) 밖에 이르러 착용하고, 성복(成服)을 기다려서 사선문(思善門)에 들어와,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효복(孝服)으로 바꾸어 입고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이것이 끝나면 각각 효복(孝服)을 가지고 나간다. 초9일·초10일도 예(禮)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대행 태상왕 전하(大行太上王殿下)께서 5월 24일에 승하하시었으니, 즉일(卽日)로 각사(各司)에서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곡림 봉위(哭臨奉慰)하고, 26일에 이르러 각각 효복(孝服)을 착용하고 곡림 봉위하며, 28일 즉 승하하신 후 제5일에 이르러 시왕(時王)의 복제(服制)에 따라 삼차(三次)의 곡림 봉위례(哭臨奉慰禮)를 행하게 하소서."
하고,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었다.
"경외(京外)의 음악(音樂)을 정지하고, 도살(屠殺)·가취(嫁娶)를 금하고, 대소례(大小禮)와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제3일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 고하소서."
태종 8년(1408년) 5월 24일
'조선왕조실록 > 승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상왕이 연화방 신궁에서 훙하다 (0) | 2022.07.1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