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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승하

태상왕이 연화방 신궁에서 훙하다

Lucidity1986 2022. 7. 17. 15:50

태상왕(태종)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적들이 와서 굴복하고, 예의가 바르고 음악이 고르며, 〈모든 법의〉 강령이 서고 조목이 제정되었다.
성품이 신선과 부처의 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사(寺社)를 개혁하여 노비를 거두고 전답을 감하였으며, 원경 왕태후의 초상에 유학의 예법을 준행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칠재(七齋)만 배설하게 하였는데, 모두 검약하게 하였으며, 능 옆에는 사찰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 능은 백 세 뒤에 내가 들어갈 데인데, 더러운 중들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칠재(七齋)도 배설하지 아니할 것이나, 다만 명나라에서 부처를 신봉하므로, 대국을 섬기는 나라로서 선뜻 달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고, 또 근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건원릉(健元陵)과 제릉(齊陵)에 사찰을 건축한 것은 태조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근일에 또한 종을 만들어 개경사(開慶寺)에 달게 하였으나, 내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다. 이제 왕후의 초상에는 내가 법을 세워서 자손에게 보이는 것인데, 만세 뒤에 자손들이 지키고 아니 지키는 것은 저희들에게 달린 것이다."

하고, 또 일찍이 좌우에 말하기를,

"세상을 혹(惑)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은 신선과 부처와 같은 것이 없다. 내가 일찍이 이궤조(李軌祖)의 전(傳)을 보고 신선과 부처의 심히 허황하고 망령됨을 알았다."

하고, 또 근신에게 이르기를,

"이제 들으니, 왕후의 재를 올릴 때, 대소 관원들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한데 섞여서 떠들어대어 거의 천 명이나 된다 하니, 부처에게 영이 없다면 몰라도, 만일 영이 있다면, 이런 것은 공경하여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

하고, 마침내 영을 내려 기신(忌晨)이나 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의 〈명복을〉 추천(追薦)하는 재는 모두 수륙재(水陸齋)만 배설하고, 절에 나가는 인원도 일정한 수를 제한하게 하였다.

세종 4년(1422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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