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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형벌

백관을 모아 강상인을 거열하고 박습과 이관을 목베며, 친족들을 귀양보내다

by Lucidity1986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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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태종)이 박은·조말생·이명덕·원숙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강상인과 이관은 죄가 중하니 지금 마땅히 죽일 것이요, 심정과 박습은 상인에 비하면 죄가 경한 듯하였다. 괴수(魁首) 심온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직 남겨 두었다가 대질(對質)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그렇지 않으면 인심(人心)과 천의(天意)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박은이 아뢰기를,

"대질시키고자 하신다면 상인만 남겨두고 세 사람은 형벌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심온의 범한 죄는 사실의 증거가 명백하니, 어찌 대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겨 두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반역을 함께 모의한 자는 수모자와 종범자를 분간하지 않는 법이오니, 어찌 차등(差等)이 있겠습니까."

고 하였다. 이에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옥에서 곤란한 일이 많사오니, 속히 형(刑)을 집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명하여 상인은 형률대로 시행하고, 박습과 이관·심정은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고, 네 사람의 부자는 교형을 면제하여 종을 삼고, 이각과 채지지·성달생은 사면(赦免)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또 계하기를,

"죄인의 부자는 이미 사형을 면하였으나, 마땅히 가산을 적몰(籍沒)해야 될 것이며, 이각과 채지지와 성달생은 모두 사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그 말을 따라 이각 등은 모두 장형(杖刑)은 면하고 외방(外方)으로 귀양가게 하니, 이각과 채지지가 모두 그전에 갔던 곳으로 귀양갔다. 백관(百官)을 모아 상인을 거열(車裂)하고, 박습과 이관과 심정을 서교(西郊)에서 목 베었다. 
임금(세종)이 문묘(文廟)에 참배하고자 하여 이미 길일(吉日)을 가렸다가, 상인 등이 처형되는 일로써 이를 정지하였다. 
상인의 아우 강상신(姜尙信)을 영해(寧海)로, 강상례(姜尙禮)를 무안(務安)으로, 강상려(姜尙呂)를 서산(瑞山)으로, 강상망(姜尙望)을 단양(丹陽)으로, 아들 강장생(姜長生)을 영덕(盈德)으로 귀양보내고, 박습의 아들 박의손(朴義孫)을 남해(南海)로, 박의보(朴義甫)를 광양(光陽)으로, 이관의 아들 이소인(李紹仁)을 울산(蔚山)으로, 형 이약(李鑰)을 통천(通川)으로 귀양보내어 모두 관노를 삼았다. 
또 이관의 숙부 이원즙(李元緝)을 평해(平海)로, 이원강(李元綱)을 장기(長鬐)로, 조카 이말한(李末漢)을 거제(巨濟)로, 이백장(李伯長)을 장흥(長興)으로 귀양보내고, 심정의 형 중[僧] 도생(道生)을 옹진(甕津)으로, 심인봉(沈仁鳳)을 해진(海珍)으로, 심징(沈澄)을 동래(東萊)로, 조카 심석준(沈石雋)을 낙안(樂安)으로 귀양보내고, 심온의 서자(庶子) 심장수(沈長守)를 사천(泗川)으로, 성달생을 삼척(三陟)으로 귀양보냈다. 박습은 옥중에 있다가 벌써 죽었다. 상인이 수레에 올라 크게 부르짖기를,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箠楚]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다."

고 하였다. 후에 변계량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무술년의 옥사(獄事)는 신이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로 있었사온데, 허지가 여러 제조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박습에게 압슬형을 쓸 것이라. ’고 하니, 여러 제조가 좋다고 하여 이에 압슬형을 쓰니 곧 자백하였습니다. 상왕께서도 또한 박습의 죄를 의심하시고 계신데, 박은이 다시 청하여 이에 목베었습니다."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허지는 오래지 않아서 죽었으니 그 보복의 틀리지 않음이 이와 같다."

고 하였다.

세종 원년(1418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