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종연(李宗衍)이 아뢰기를,
"어젯밤에 신(臣)이 명을 받들고 김초(金軺)를 잡으러 갔더니, 김초가 이미 달아나 숨었습니다."
하니, 승정원에서 성문(城門)을 닫고 뒤쫓아 잡기를 청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김초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아갔다. 승정원에 명하여 국문(鞫問)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정승 및 왕자·왕손이 남의 아내나 첩을 장차 수없이 빼앗을 것이다.’ 하였는데, 너는 누가 남의 처나 아내를 빼앗은 것을 보았느냐? 이철견(李鐵堅)에게 말하기를, ‘발설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였는데, 무슨 말이냐? 어찌하여 한치의(韓致義)가 누이를 팔아서 관직을 받았다고 말하였느냐?"
하니, 김초가 대답하기를,
"한치의는 정승의 아들이요 수빈(粹嬪)의 아우로서 신의 첩을 빼앗았으니, 사람들이 다 이와 같다면 왕자·왕손 및 정승으로서 남의 처첩을 빼앗는 자도 또한 반드시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뜻이고, 남의 처첩을 빼앗은 자를 보고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철견에게 발설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이철견은 대비(大妃)의 족친(族親)이고 한치의는 수빈의 족친이며, 또 두 사람이 한 동리에 사는 친한 사이이므로 이철견이 말을 전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이철견도 마찬가지로 외척(外戚)이므로 그 말이 흡사함을 싫어할까 의심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한치의가 누이를 팔아서 관직을 받았다는 것은, 한치의가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에 수빈의 대가(代加)로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는데, 신이 그때 그 도(道)의 도사(都事)로 있었고, 또 한치의와 친하게 지내서 그 일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에는 남이(南怡)가 잡아서 물으려는데 속여서 회암사(檜巖寺)로 가더니 이번에도 명을 듣고서 달아났으니, 나를 연약하게 여겨서 그러는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거든 장(杖)을 때려서 신문하라."
하였다. 장(杖) 26대를 때리니, 김초가 말하기를,
"신이 달아난 것은 실로 연약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외쳐 말하기를,
"원통하다! 김순성(金順誠)아, 이극돈(李克墩)아!"
하였다. 묻기를,
"이극돈과 김순성을 부르면서 원망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김초가 말하기를,
"일찍이 이극돈에게 한치의가 첩을 빼앗은 일을 말하였더니, 한치의에게 글을 보내어서 굴욕을 주라고 이극돈이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김순성은 실로 망령되게 부른 것입니다."
하였다. 또 장을 때리니, 말하기를,
"신이 달아나려고 할 때에 김순성에게 가서 의논하였더니, 김순성이 ‘너에게 죄가 없는데 왜 달아나느냐?’고 말하며 옥(獄)에 나아가도록 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예종)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니,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영의정(領議政)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좌의정(左議政)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윤사분(尹士昐)·우의정(右議政) 윤자운(尹子雲)·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대사헌(大司憲) 오백창(吳伯昌)·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김초에게 묻기를,
"너는 늘 누구를 위하여 세상에서 살아 가느냐?"
하니, 김초가 대답하기를,
"집에서는 어버이를 위하고, 나가면 임금을 위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임금이 연약하다고 네가 말하였으니, 네 임금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너를 죽이지 않겠느냐? 조선의 사직(社稷)을 어떤 처지에 두려고 하였느냐? 네가 말하기를, ‘임금을 연약하게 여겨서 달아났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장(杖)을 견디지 못하여 우선 말을 둘러대어서 장 한 대라도 늦추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이는 신하로서 차마 못할 말이거니와, 어찌 마음에 없는데도 입밖에 낼 수 있겠느냐? 또 내가 유약(幼弱)하다고 너와 함께 평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말하여라."
하니,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또 김초에게 묻기를,
"의금부(義禁府)에서 너를 잡는다는 것을 누가 말하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흐릿해서 어느 사람이 말하였는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므로, 장을 때려 신문하니, 말하기를,
"형의 아들 김광서(金光瑞)가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극돈(李克墩)을 불러서 김초가 한 말을 물으니, 이극돈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김초가 신의 집에 와서 신이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는 매우 훌륭하게 집안을 다스리는데, 나는 첩도 보존하지 못하고 남에게 빼앗겼다. 요즈음 들으니 첩이 서울에 올 것이라고 하는데, 길에서 기다렸다가 빼앗고자 한다.’ 하기에 신이 말리면서 ‘네가 준 폐물(幣物)이나 한치의에게 글을 보내서 돌려받도록 하라.’고만 말하였습니다."
하고는, 이극돈이 김초에게 외치기를,
"이렇게 말하였지?"
하니, 김초가 응답하기를,
"모두가 맞는다."
하였다. 한치의(韓致義)가 아뢰기를,
"신이 김초의 첩을 빼앗았다고 남들이 말하니, 신이 어떻게 뻔뻔스럽게 조정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변명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김초는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가산(家産)은 적몰(籍沒)하며, 아들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처첩(妻妾)과 딸 및 계집종 효도(孝道)는 관비(官婢)로 영속(永屬)시키고, 삼촌질(三寸姪) 김광서(金光瑞)는 장(杖) 1백 대에 관노(官奴)로 영속시키고, 연좌(緣坐)는 한결같이 모반(謀反)의 예(例)에 따르되, 그 족친으로서 율문(律文)에 연좌되어야 하게 되어 있는 자 외에는 모두 놓아 주라."
하고,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신하로서의 죄는 불경(不敬)보다 큰 것이 없고, 나라의 법은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 더욱 엄한 것이니, 화(禍)를 스스로 불러들인 자에게는 형벌을 가하는 것이 부득이하다. 이번에 김초가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드디어 분한 말을 내어서 종척(宗戚)을 업신여겼으므로, 내가 잡아오라고 명하였는데도 또다시 달아났으며, 잡아다가 물었을 적에도 말이 오히려 공손하지 않았으니, 이러한데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경계하는 뜻을 보이겠는가? 이에 중한 법으로 처치하고 처자식을 아울러 연좌시킨다. 아아! 엄중한 형벌과 중한 법은 가해야 할 데에 가하는 것이니, 조짐을 끊고 기미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김초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로 있고 한치의가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었을 때에, 김초가 안수의(安修義)의 딸을 첩으로 삼았으나, 계집의 나이가 어리고 다만 그 집에서 이틀밤을 머물렀는데 김초가 벼슬이 갈리게 되어서 데려오고자 하였으나, 물의가 두려워서 제 옷을 남겨두어 뒷날의 약속을 굳게 하였었는데, 뒤에 한치의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김초는 성품이 경망하고 스스로 뽐내어, 일찍이 고향에 있을 때에는 유박(帷薄) 이 문란하다는 꾸지람을 들었고, 또 그 처를 박대하였다. 집 때문에 소송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초가 싼 값으로 그것을 사서 그 소송을 대신하였으며, 이와 같은 일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처형 받는 날은 부자가 동시에 형틀에 매여 나왔는데, 아들이 김초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제는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폐해를 아셨습니까?’ 하니, 김초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지 않았으며, 형장(刑場)에 이르러서는 좌우의 재상(宰相)들을 부르며 말하기를, ‘나는 죄가 없다.’ 하였다. 김초는 비록 제 죄를 스스로 재촉하였으나, 한치의는 김초와 서로 친한데도 도리어 그의 첩을 빼앗았으므로, 물의가 그를 경박하게 여겼다.
예종 1년(1469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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