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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전쟁

징병 제찰사 이원익 등을 인견하고 격려한 뒤,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다.

by Lucidity1986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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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조)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와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 우부승지 신잡, 주서(注書)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경이 전에 안주(安州)를 다스릴 적에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들을 효유하여 인심을 수습하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니 경성(京城) 가까이 온다면 관서로 파천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경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니, 원익이 배사(拜辭)하고 물러갔다. 상이 또 최흥원(崔興源)에게 이르기를,

"경이 해서 지방을 잘 다스렸으므로 지금까지 경을 흠모한다고 한다. 지금 인심이 흉흉하여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윗사람을 위해 죽는 의리가 없어졌으니, 경은 황해도로 가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선왕(先王)의 깊은 사랑과 두터웠던 은혜를 일깨워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단결시키는 한편 군사들을 소집하여 혹시라도 이반자가 생기지 않도록 단속하여 거가(車駕)를 영접하라."

하니, 흥원이 명을 받고 원익과 더불어 배사(拜辭)하고 물러가 그날 즉시 떠났다. 신잡(申磼)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위구심을 갖고 있으니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시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주서(注書)와 사관(史官) 등이 아뢰기를,

"춘궁(春宮)이 오래도록 비어 있으니 일찍 세자를 책봉하는 일을 누군들 원하지 않겠습니까. 세자를 세운다면 인심이 진정될 것입니다."

하고, 잡도 아뢰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진정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아뢴 바와 같다면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겠는가. 대신들은 빈청(賓廳)에 있는가?"

하였다. 존세(存世)가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대신들이 어떻게 감히 집으로 물러가 있겠습니까. 다들 빈청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불러들이라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내가 편복(便服)으로 대신을 인견할 수는 없다. 예(禮)에 맞지 않으니 내전으로 들어가 옷을 바꾸어 입은 후에 인대(引對)하겠다."

하였다. 잡이 나아가 상의 옷자락을 잡고 아뢰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신들을 불러들이라."

하였다. 잡이 주서(注書)를 시켜 대신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이 들어와 입시석(入侍席)에 앉아서 오랫동안 어탑(御榻) 앞에 나아가지 않으니 좌우의 사관(史官)들이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서 전교를 듣게 하였다. 대신들이 앞으로 나아가니 상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다시 형적(形迹)을 보존할 수가 없다. 경들은 누구를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대신들 모두가 아뢰기를,

"이것은 신하들이 감히 아뢸 바가 아니고 마땅히 성상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되풀이하기를 서너 차례 하자 밤이 이미 깊었건만 상은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산해가 허리를 굽히고 자리를 피하려 하자, 잡이 말하기를,

"오늘은 기필코 결정이 내려져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

하니, 대신은 다시 자리로 나아갔다. 상이 약간 미소를 띠고 이르기를,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일시에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종묘 사직과 생민들의 복입니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이현(梨峴)에 있는 궁(宮)을 호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초봄에 날을 골라 책립(冊立)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때 마침 덕빈(德嬪)의 장례가 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연되었다. 광해가 내전에 들어온 지 벌써 3일이나 되었는데 이현의 빈 궁을 호위해서 무엇하는가."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는 집이 문(門) 밖에 있는데 밤이 이미 깊었으니 유문(留門)하고 명패(命牌)하여 제반 일을 밤새워 준비할 것으로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주서(注書)와 사관(史官)들은 대신으로 하여금 바깥에 나가 속히 거행하도록 주선하라."

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가 차례대로 물러나왔고 잡(磼)이 즉시 나와 교지를 내렸다. 이것은 대개 며칠 전에 세자 책봉에 대한 상소가 많았던 까닭에 상이 마음속으로 정한 바가 있었던 참인데 이날 잡 등이 합문(閤門) 밖에서 의논을 정하여 들어와서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선조 25년(1592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