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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졸기

효령대군 이보의 졸기

Lucidity1986 2022. 7. 17. 15:23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가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보(𥙷)는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이미 관례(冠禮)하고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封)해졌다.
젊어서부터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일찍이 태종을 따라 평강(平康)에서 사냥하면서 다섯 번을 쏘아 다섯 번 다 맞추니, 위사(衛士)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편치않으므로 이보(李𥙷)가 몸소 탕약(湯藥)을 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태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비[臧獲]를 내려 주었다. 세종(世宗)께서 우애(友愛)가 지극히 도타와서 늘 그 집에 거둥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야 파(罷)하곤 하였다.

이보(李𥙷)가 부처[佛]를 좋아하여 중들을 많이 모아 불경(佛經)을 강(講)하였는데, 세조(世祖)의 돌보아 줌이 지극히 융숭하여서 상뢰(賞賚)함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궁중(宮中)에서 곡연(曲宴)을 할 때면 이보(李𥙷)가 일찍이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어, 혹 밤중에 물러가기도 하였는데, 〈이런 때면〉 세조가 초[燭]를 잡고 배웅하였으며, 원각사(圓覺寺)를 창건(創建)함에 미쳐서는 그 일을 맡아 보도록 명하였다.
임금(성종)이 즉위(卽位)하여서는 이보(李𥙷)가 나이 많고 종실의 웃어른[屬尊]이라 하여 예우(禮遇)함이 더욱 융숭하였으며, 여러 번 그 집에 거둥하여 잔치를 베풀고는 그를 영화롭게 하였다. 이보(李𥙷)가 만년(晩年)이 되어서는 따로 띳집[茅屋]을 지어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해 놓았는데, 비록 한추위나 한더위라 할지라도 늘 거기에서 거처하였다. 아들 7인(人)이 있어, 가장 젊은 사람의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매양 좋은 날 아름다운 절기에는 술잔을 들어 축수(祝壽)하고, 창안 백발(蒼顔白髮)로 슬하(膝下)에서 춤을 추니, 진실로 한 시대의 성사(盛事)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91세였다.

시호(諡號)를 정효(靖孝)라 하였으니, 너그럽게 즐기며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지혜롭게 부모(父母)를 사랑하고 공경한 것을 효(孝)라 한다. 이보(李𥙷)는 불교[釋敎]를 혹신(惑信)하여 머리 깎은 사람들[緇髡]의 집합 장소가 되었으며, 무릇 중외(中外)의 사찰(寺刹)은 반드시 수창(首唱)하여 이를 영건(營建)하였다. 세조(世祖)가 불교(佛敎)를 숭신(崇信)하여 중들로 하여금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니, 반드시 이보(李𥙷)의 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이보는 밖으로 청렴한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사실 탐욕(貪慾)하여서 거짓 문계(文契)를 만들어 남의 노비[臧獲]를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여러 아들들이 재산을 다투어 화목(和睦)하지 못하였다. 이보(李𥙷)가 일찍이 절[寺]에 예불(禮佛)하러 나아갔는데,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개[犬]를 끌고 팔에는 매[鷹]를 받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서 절의 뜰에다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 놓으니, 이보(李𥙷)가 마음에 언짢게 여겨, 이에 말하기를,

"형님은 지옥(地獄)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하니, 이제(李禔)가 말하기를,

"살아서는 국왕(國王)의 형(兄)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菩薩)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