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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졸기

금천부원군 박은의 졸기(1422년)

by Lucidity1986 202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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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왕자의 난' 에서의 박은. 배우는 박영지 님인데 제 5공화국 장포스의 야이 반란군놈의 새끼들아를 직접 듣는 유학성 중장 역할을 맡았다.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라났다.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 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여러 번 전임하여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임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할 때, 밖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치 성적이 제일이었으며, 좌보궐(左補闕)로 전임되었다가 태조 3년에 또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외람히도 어리석은 사람이 지나치게 알아주심을 받아, 금주(錦州) 3년의 임기를 면하고 조정으로 들어와 문하부(門下府) 간관(諫官)의 영광을 받았는데, 갑자기 동료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실로 나의 잘못으로 스스로 취한 것이나, 다시 군직(軍職)을 받게 되었으니, 오직 공(公)이 용서한 덕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말과 행실이 그릇될까 두려워하며, 외롭고 가난하고 병까지 있는 몸이나, 뜻과 기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각하가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지 아니하니, 내 어이 보통 사람과 같이 보답하리오. 이미 각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각하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각하는 임금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요, 나라와 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을 각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요, 노둔한 자질을 밝을 때에 다 바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객이 수없이 드나들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같이 드나들 것이로되, 진실로 뜻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렇게 하지 아니하리오."

하였다. 태조 6년에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만일 당신의 나이에 이르면, 나도 또한 당신과 같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곤욕을 주느냐."

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양이 항복한 왜놈과 결탁하여 본국에 배반하였다 하고 헌부(憲府)를 시켜 다스리게 하였었다. 그때 집정은 생각하기를,

"은은 일찍이 양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잘 적발할 것이라."

하고, 〈은을 사헌 시사에 임명하는〉 인사가 있은 것이다. 은이 대(臺)에 오르게 되자, 양이 뜰 아래서 쳐다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은이 반드시 그전 원망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리(刑吏)가 결안(結案)을 가지고 은에게 나오니, 은이 붓을 던지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는 데 빠지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아니하여, 아무 일 없이 양을 보호하여 죽지 않게 하였다. 뒤에 양이 정승(政丞)이 되어 은에게 이르기를,

"양은 진실로 소인이었다. 그대의 말채나 잡고 나의 평생을 마치려고 한 것이 오래였다."

라고 하였다. 

집정은 은을 미워하여 지방으로 내보내어 지춘주사(知春州事)가 되었다. 태조 7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오니, 태상이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사헌 중승(司憲中丞)에 임명하였다. 정종 원년에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가 되었다가, 곧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었고, 2년에 공정왕이 태상을 세자로 책봉(冊封)하자,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과 세자 좌보덕(世子左輔德)을 거쳐서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에 전임되고, 태상이 임금이 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에 임명되고, 태종 원년에 호조 전서로 전임되고,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는데, 교서(敎書)를 내려 포장하였다. 병·리(兵吏) 두 조(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더 받고, 관계를 올려 반남군(潘南君)에 봉하였다. 

2년에 강원도 관찰사, 3년에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승추부 제학(承樞府提學)으로 전임하고, 4년에 면직되고 반성군(潘城君)에 봉하였다가 곧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는데, 조정에서 공신은 외임으로 내보낼 수 없다 하므로 정지하였다. 6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에서 환자(宦者) 황엄(黃儼)을 보내서 제주(濟州)의 동불(銅佛)을 구하여, 간 데마다 위세를 부리므로, 여러 도의 관찰사가 위세에 눌려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오직 은이 예(禮)대로 대접하니, 엄도 흉악한 버릇을 거두고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으며, 〈서울에〉 돌아와서 태상에게 사뢰기를,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뿐이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중앙으로 불러올려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임명하고, 8년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사헌부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때 하윤(河崙)이 좌정승(左政丞)이 되어서 모든 일을 혼자서 결재하고, 우정승 이하는 다만 서명할 따름이었다. 은은 일이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윤의 앞에 나아가서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다가, 〈자기의 의견을〉 받아주지 아니하면 서명하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형조 판서로 임명되고, 9년에 반성군(潘城君)으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겸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되고, 10년 왕명을 받아 평양성(平壤城) 수축을 감독하고, 공사가 끝난 뒤 〈준공을〉 보고하니, 태상왕은 조정 관원을 보내어 선온(宣醞)과 표리(表裏)를 내려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판서로 전임되었다. 13년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서 봉하고, 겨울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였다. 이때 옥사를 판결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형장으로〉 그 정상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심문하는 형장이 일정한 수가 없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형장 밑에서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리오."

하고, 곧 임금에게 계하여 심문하는 형장은 한 차례에 30대씩으로 정하여, 일정한 법을 만드니,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았다. 

관계가 숭정(崇政)으로 오르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6년 3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고, 5월에 의정부 우의정에 오르고, 11월에 좌의정으로 올라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고, 18년에 태상왕이 임금에게 선위하려고 하였으나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은이 〈그 뜻을〉 짐작하여 알고 심온(沈溫)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임금의 의향을 그대가 아는가."

또 말하기를,

"임금의 처사는 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끝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내선(內禪)한다 할지라도 아무 탈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온이 은의 말을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이 은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고, 더욱 온과 말한 것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여 곧 태상왕에게 계하였다. 태상왕이 선위한 뒤, 임금이 태상왕께 사뢰기를,

"은이 어느 날 온에게 내선한다는 일을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은은 순결한 신하가 아닙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내선하겠다는 말을 하였고, 은이 직접 이것을 들은 까닭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

하였다. 심온이 죄를 받게 되자, 은이 태상께 계하기를,

"온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자기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하니, 태상은 듣고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기를,

"은은 자기 반성은 할 줄 모르고 온의 세력부린 것만 허물하는가."

하였다. 김점(金漸)이 항상 조정에서 은을 보면, 반드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대의 등용한 사람은 다 그대의 집에 드나들던 자요, 우리들의 부탁한 사람은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니 옳은 일인가,"

하니, 은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은이 비록 친척을 많이 등용하였으나, 조정의 명사를 다 뽑아 썼으므로, 남들이 심히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은은 췌마(揣摩)의 재주가 있고, 임금의 의향을 잘 맞추어 나갔다. 세종 원년 봄에 태상이 평강(平康) 등지에 거둥할 것을 내심으로 작정하고 은과 유정현(柳廷顯)·이원(李原)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호위하는 사람을 간편히 하고, 잠시 동안 평강에 행행(行幸)하려고 한다."

하니, 정현이 말하기를,

"이제 농사가 한참 성하여, 비록 호위할 사람을 간편히 한다 할지라도, 두 임금이 거둥하면, 민폐가 많을 것입니다."

하고, 은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심히 옳습니다."

하고, 원은 두 사람의 말을 어름어름하여 두었다. 태상이 전지(傳旨)하기를,

"영의정의 말은 내가 공경하여 듣고, 좌의정의 말인들 또한 어찌 망령된 신하라 하겠는가."

하였다. 은의 얼굴빛이 크게 변하여 정현과 서로 좋게 지내지 아니하였다. 3년 12월에 병으로 의정(議政)을 사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자택에서 요양하였는데, 병이 짙어지자 태상이 약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계속하여 내선(內膳)을 내리고, 또 내옹인(內饔人)을 그의 집에 보내어 명하기를,

"조석 반찬을 그의 원하는 대로 하여 주되, 내가 먹는 것이나 다름없게 하라."

하고, 태상이 병환 중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다. 

은이 태상의 병환이 오래 간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의 병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성명하신 임금은 만년을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작고한 연령이 53세이다. 사흘 동안 정사를 보지 아니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시호를 평도(平度)라 하였는데, 강기(綱紀)를 펴 다스려 나가는 것을 평(平)이라 하고, 마음이 능히 의(義)를 재량할 줄 아는 것을 도(度)라 하였다. 

은은 식견이 밝고 통달하며, 활발하고도 너그러우며, 의논이 확실하였다. 내외의 직을 역임하여 업적이 심히 많았는데, 태상왕이 크게 소중히 여겨,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그를 참여시켰다. 아들은 박규(朴葵)·박강(朴薑)·박훤(朴萱)이었다.

 

-세종 4년(1422년) 5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