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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졸기

좌의정 허조의 졸기

Lucidity1986 2022. 7. 5. 05:14

좌의정 허조(許稠)가 졸(卒)하였다. 허조는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데, 자(字)는 중통(仲通)이다.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뒤에 은문(恩門) 염정수(廉廷秀)가 사형을 당하였는데, 문생(門生)과 옛 부하이던 아전[故吏]들이 감히 가 보는 이가 없었는데, 조(稠)는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곽을 준비하여 장사지냈다. 경오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임신년에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시어 특별히 좌보궐(左補闕)을 제수하였고, 곧 봉상시 승(奉常寺丞)으로 옮겼다. 그때에 예제(禮制)가 산실(散失)되었었는데, 조(稠)가 전적(典籍)을 강구(講究)하여 힘써 고제(古制)에 따르게 하였고, 뒤에 잇따라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였는데, 무릇 치상(治喪)하기를 일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하고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손수 고치를 켜서 실을 뽑아 겹옷을 지어 조(稠)에게 주었으므로, 매양 기일(忌日)을 당하거나 시제(時祭) 때에는 반드시 속에다 입고, 반드시 맹교(孟郊)의 ‘자모수중선(慈母手中線)’ 이라는 시(詩)를 외었으며, 일찍이 자손에게 명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 옷으로 염습하라."

하였다. 정축년에 성균 전부(成均典簿)를 제수받았다. 그때에 국가가 초창(草創)임으로, 선성(先聖)에게 석전(釋奠)할 겨를이 없어, 고제(古制)에 자못 어긋났으므로, 조(稠)가 홀로 개탄하고, 이에 겸 대사성(兼大司成) 권근(權近)에게 말하여 석전 의식(釋奠儀式)을 구득(求得)해서 강명(講明)하여 개정(改正)하였다. 경진년에 사헌부 잡단(雜端)162) 을 제수받았다가 완산 판관(完山判官)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궐(闕)하니, 태종(太宗)이 그 인선을 어렵게 여기어, 친히 관원의 명부[班簿]를 열람하다가 조(稠)의 이름을 보고,

"사람을 얻었다."

하고, 드디어 조(稠)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정해년에 세자(世子)가 경사(京師)에 갈 적에 특별히 조(稠)를 사헌 집의(司憲執義)에 제수하고 서장 검찰관(書狀檢察官)을 삼았다. 가다가 궐리(闕里)에 이르러 동자(蕫子) ·허 노재(許魯齋)의 종사(從祀)와 양웅(揚雄)의 쫓겨난 것을 묻고, 돌아와서는 건의하여 모두 그 제도대로 따르게 하였다. 신묘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승진되어, 상서(上書)하여 처음으로 학당(學堂)과 조묘(朝廟)의 의식을 세우고, 아래로는 신서(臣庶)의 상제(喪制)에 대한 법식에 이르도록 참작(參酌)하고 증손(增損)하여 상전(常典)을 이루었으니, 이때부터 의례상정소 제조(儀禮詳定所提調)를 겸하였다. 처제(妻弟)가 있는데, 일찍 과부가 되었고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稠)의 장자(長子)인 허후(許詡)로써 후계를 삼고, 노비[臧獲]·전택(田宅)·자재(資財)를 다 주겠다고 하였으나, 조(稠)가 굳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내 자식이 비록 재주가 없으나, 집을 계승할 자이다. 만약 재보(財寶)를 많이 얻으면 반드시 호치(豪侈)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하고, 굳이 거절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병조와 이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는데, 하루는 면대(面對)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강무(講武)는 군국(軍國)의 중사(重事)이니 비록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종류는 군자(君子)가 몸소 죽이지 않는 것이온데, 하물며 험조(險阻)한 곳을 달린다는 것은 위험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옵고, 혹시라도 맹수라도 만나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삼가시어 친히 쏘고 사냥하지 마옵소서."

하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잇대어 강무장(講武場)이 너무 많아서 거민(居民)들이 받는 폐해를 극력하여 진술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병신년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매,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봉상 제조(奉常提調)를 삼으니, 수리하고 건설하는 것이 많았다. 무술년에 세종(世宗)께서 선위(禪位)를 받으시매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고, 신축년에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태종(太宗)이 세종(世宗)께 이르기를,

"이가 진실로 재상(宰相)이다."

하였다. 뒤에 풍양 이궁(豐壤離宮)에서 곡연(曲宴)을 하였는데, 연회가 파한 뒤에 태종이 명하여 조(稠)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손으로 조(稠)의 어깨를 짚고 세종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주석(柱石)이다."

하고, 또 조(稠)에게 이르기를,

"이제 내가 경(卿)을 칭찬하는 것은 무엇을 구(求)하려 하는 것인가."

하니, 조(稠)가 놀라고 감격하여 울었다. 임인년에 태종이 훙(薨)하니, 조(稠)가 항상 최복(衰服)을 옆에다 두고 때때로 슬피 울었다.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매양 전주(銓注)할 때에, 고려(高麗) 및 아조(我朝)의 명신(名臣)으로서 사절(死節)한 이의 후손과 중외(中外)에서 추천한 효자 순손(孝子順孫)을 모두 다 등용하니,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어찌 참된 효자 순손이 이같이 많겠소."

하니, 조(稠)가 말하기를,

"일리(一里)에도 미인(美人)이 있다 하는데,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 중에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소, 좋은 인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오. 비록 거짓인 자가 있더라도 그 풍속(風俗)을 권려(勸勵)하는 데에 무익(無益)하다고 할 수 없고, 또 다음날에 그것이 풍화(風化)가 되어, 참된 효자 순손이 그간에 배출할는지 어찌 알 수 있겠소."

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할 때마다 신료들의 현명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의논하였는데, 조(稠)의 말을 많이 따랐다. 조(稠)가 삼가고 지켜 입 밖에 내지 않아서, 당사자는 끝내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인견(引見)하고 일을 의논하다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경이 사사로 좋아하는 자를 임용한다고 하더라."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 말과 같사옵니다. 만일 그 사람이 현재(賢才)이라면,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신이 피혐(避嫌)하지 아니하고, 만일 그 사람이 불초(不肖)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조화(造化)를 가져다가 외람되게 사사로 친한 자에게 주겠습니까."

하였다. 조(稠)가, 대간(臺諫)이 꾸지람을 당하면 반드시 진력(盡力)하여 구원하며 말하기를,

"언관(言官)을 설치한 것은 장차 인주(人主)를 간(諫)하고 백관(百官)을 규찰(糾察)하려 함이었는데, 비록 혹시 잘못이 있다 하여도 어찌 급하게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자년에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전후(前後)에 인선(人選)을 맡은 것이 거의 10년 동안에 이르렀다. 한 관직에 결원이 생기면 반드시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정밀하게 간택(揀擇)하게 하고, 다시 함께 평론(評論)하여 중의(衆議)가 합한 연후에야 임명하였다. 조(稠)가 일찍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일을 의논하는데,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가 명령을 받고 왔으므로, 조(稠)가 이르기를,

"옛날 우리 태종께서 해청(海靑)을 기르시다가, 후세에 법으로 남길 수 없는 일이라 하시고, 즉시 명하여 놓아주게 하시었사옵니다. 이제는 이미 진헌(進獻)할 것도 없으니 기르지 말게 하여, 후세 자손들에게 보이소서."

하니,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므로, 종서가 갖추 아뢰었다. 병진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서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가, 무오년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승진되었고, 기미년 6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어 10월에 병이 드니, 임금이 어의(御醫) 두 사람에게 명하여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날마다 내의(內醫)와 내노(內奴)를 시켜 문병하게 하였다. 이해 12월에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는데, 병이 위독하여 명령을 배수(拜受)하지 못하였다. 병이 더하고 위급한데, 조(稠)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의원(醫員)을 보아서 무엇할까."

하고, 또 말하기를,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浩然)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하였다. 이날에 조(稠)의 형(兄) 허주(許周)가 들어와 보니, 조(稠)가 흔연(欣然)히 웃고, 그 아내가 들어와 보아도 역시 그러하였다. 아들 후(詡)가 옆에 있는데 역시 보면서 웃고 다른 말은 다시 없었다. 곧 죽으니 나이 71세이다. 유명(遺命)으로 상사(喪事)는 일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르게 하고, 또 외가(外家)가 후손이 없으니 삼가 묘제(墓祭)를 폐하지 말라고 하였다. 부음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매우 슬프게 여기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고기〉 반찬을 거두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관(官)에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낮이나 밤이나 경계(警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동궁(東宮)에서도 역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하였다. 조(稠)의 성품은 순진하고 조심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사서(四書)》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과 성리(性理)의 여러 책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좋아하여 읽었다. 비록 갑자기 당하였어도 빠른 말과 당황하는 빛이 없었으며, 제사(祭祀)를 받들기를 반드시 정성으로 하고, 형(兄)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고,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용이 있었으며, 반드시 경조(慶弔)와 문병(問病)을 친히 하였었다. 항상 한 사람의 창두(蒼頭)를 시켜서 명령을 전달하였고, 문앞에는 정지해서 있는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대(待)할 때에는 반드시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분별을 엄히 하였다.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며, 옷은 몸 가리기만을 취(取)하고, 먹는 것은 배를 채우는 것만을 취하여, 싸서 가져오는 것을 받지 아니하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희롱하고 구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관(官)에 있을 때는 상관(上官)을 섬기기를 매우 존경(尊敬)히 하고, 요좌(僚佐)를 대하는 데에는 엄격하게 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직무에 충실히 하고,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있으니 허후(許詡)와 허눌(許訥)이다.

세종 21년(1439년) 1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