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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관심사 62

조선 왕조의 역대 묘호(명종~순종)

13. 명종 이환(1534~1567, 재위 1545~1567) 明이라는 자에는 '생각이 과감하고 원대하다, 사방에 밝은 빛을 비추다, 어진 사람을 멀리서 구한다'는 뜻이 있다. 예종과 같이 생전에 시호는 명(明)이면 족하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선조수정실록 7월 17일) 이외 한국사에서는 고려 명종 왕호(19대)가 있는데 최충헌에 의해 유폐된 후 창락궁에서 병사했다. 중국사에서는 원 명종 보르지긴 쿠살라 이외에는 통일왕조에서의 예가 없다. 이 사람은 재위 6개월만에 향년 29세로 독살당했다. 14. 선조 이연(1552~1608, 재위 1567~1608) 능력은 충분하고 인재보는 눈이 뛰어났지만(원균:?) 이기적이고 음험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선조 본래의 묘호는 선종(宣宗)이며, 광해군 8년(1616년..

조선 임금의 역대 묘호(태조~인종)

중국사에서의 묘호는 통일왕조+삼국지+요, 금, 몽골의 예만 다룬다. 1.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 태조는 나라를 창건한 창업군주나, 건국하지는 않았으되 실질적으로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후 추존될 때 부여되는 묘호로 당연히 최고의 묘호에 해당한다. 유사한 묘호로는 고조가 있다. 중국사에서는 한 태조 고황제 유방, 위 태조 문황제 조조(조비에 의해 추존), 진 태조 문황제 사마소(사마염에 의해 추존), 수 태조 무원황제 양충(수문제 추존), 요 태조 야율아보기, 송 태조 조광윤, 원 태조 보르지긴 테무진(흔히 칭기즈 칸, 쿠빌라이 추존),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 청 태조 천명제 애신각라 누르하치 등이 있다. 이들 모두 국가를 창건하거나 그에 준하는 공이 있는 황제들이지만, ..

사병의 피살과 군기(1958년)

광주에 있는 육군 제 31사단 포병단의 변소에서 타살된 사병의 시체가 발견된지 이주일만인 14일 범인이 체포되었는데 범인은 동 포병단의 기간사병인 김응규 병장이며 "소변보는 태도가 나쁘다"는 것이 구타치사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피살자 최용수 사병은 입소한지 5일만에 타살되었다는것인데 용변태도가 나쁘다는것이 발단이 되어 치사에까지 이른 군대 내 군기는 심심한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라고 아니할수없다. 더구나 근자에 들어와서 군수물자 보급품을 관리장교들이 부정착복하여 거액의 축재를 하고 있는 사실이 연이어서 드러나고 있어서 군 위신과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일개 사병의 사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군기 자체에 관련되느니만큼 이것이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이는..

사기 - 조선열전(2)

2. 분열과 치욕 그런데 원래 좌장군 순체는 궁중에서 황제를 모시고 그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그가 이끄는 연나라 군사들과 대(代)나라 군사들은 매우 흉악하였고 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매우 교만해져 있었다. 하지만 누선장군 양복은 제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처음부터 공격에 실패해 병사들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사병들은 싸우기를 겁냈고 군관들 역시 마음속으로 불안해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거왕을 포위할 때도 항상 화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좌장군 순체의 공세는 오히려 매우 급했고, 조선은 은밀히 사람을 파견하여 누선장군과 우호를 맺고 누선장군과 투항에 관한 일을 협의하면서 왕래하였다.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순체는 몇 번이나 양복과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지만..

사기 - 조선열전(1)

1. 아무도 의심하여 믿지 못하다. 조선의 왕 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는 전성시대에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는 한편, 국경 지대인 요동 지방에 요새를 쌓게 했다. 훗날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선은 곧 요동군 밖에 있는 국가로 되었다. 한(漢)나라때 조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방어가 곤란하여 요동의 요새를 다시 쌓고 패수(浿水 : 중국 주장은 압록강, 우리나라 주장은 송화강)를 경계로 하여 그 땅을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그 뒤 연나라 왕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匈奴)로 도망갔을 때 위만도 망명했다. 그는 천여 명을 이끌고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 요새 밖으로 탈출하였다. 그들은 패수를 건..

1. 부종

부종(edema) 부종이란 세포 바깥에 있는 체액(體液)이 혈관 이외의 부분에 과하게 축적되는 현상을 말한다. 부종은 병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생리적 현상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서 있거나 앉은 자세 후에 다리가 붓는다던지 등 부종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국소적인 부종 - 관절에 염좌가 있거나 근육손상으로 인해 야기되는 경우 - 탄력붕대를 오래 감고 있어 혈액이나 임파액의 순환을 저해시킨 경우 - 직업 등의 이유로 오래 서 있는 경우 -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는 허벅지의 혈액순환이 방해되어 종아리에 부종이 생길 수 있다. 이는 몸에 꽉 끼는 옷을 입는 경우도 포함된다. 2. 전신부종 - 염분으로 인한 부종(라면먹고 잤더니 등..) - 항 고혈압제나 호르몬제,..

지질시대의 역사 표

출처 : 나무위키 이름하위구분시기(년)비고명왕누대4,500,000,000~3,800,000,000이 당시는 표면이 아직 매우 뜨겁고 화산 활동이 활발한,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와 같은 시기였다. 이 시기의 지구는 육지는 뜨거운 용암과 화산 활동이 쉴새 없이 진행되었다. 명왕누대 초반부인 지구의 강착 시절 이후 중기 명왕누대 시기 이후에는 맨틀, 지각이 생긴 시대이다. 또한 생명체와 화석 등의 생물학적 증거는 물론, 돌(지르콘)과 같은 지질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시대이다.시생누대초시생대3,800,000,000~3,600,000,000지구의 지각열류량이 지금의 3배 정도 지금보다 8배 이상 많았던 칼륨-40, 지금보다 훨씬 많이 존재했던 우라늄-235와 우라늄-238고시생대3,600,000,000~3,..

무작위 연도(500~경술국치)

566년남진(南陳) 2대 세조(世祖) 문제(文帝) 진천(陳蒨) 7년(~566)북제(北齊) 5대 후주(後主) 고위(高緯) 2년(~577)북주(北周) 3대 고조(高祖)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 6년(~578)신라(新羅) 24대 진흥왕(眞興王) 김삼맥종(金三麥宗) 27년(~576)고구려(高句麗) 25대 평원왕(平原王) 고양성(高陽成) 8년(~590)백제(百濟) 27대 위덕왕(威德王) 부여창(扶餘昌) 13년(~598)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 탄생하다. 567년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탄생하다.(화랑세기본) 568년진흥왕이 대창(大昌)으로 개원하다. 572년진흥왕이 홍제로 개원하다. 576년신라(新羅) 25대 진지왕(眞智王) 김사륜(金舍輪 혹은 金金輪) 원년(~579) 577년북제(北齊) 6대 유주(..

무작위 연도(기원전~500년)

기원전 225년진(秦) 37대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 22년(~210)위(衞) 49대 각(角) 5년(~209) 진의 왕분(王賁)이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3개월만에 수공(水攻)으로 함락시키고, 국왕을 사로잡아 군현을 설치하다. 이로서, 위나라 멸망하다. 위나라의 멸망으로 삼진(三晋)을 모두 평정했다. 진의 몽염(蒙恬)과 이신(李信)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평여(平與)와 침(寢)을 각각 공격하여 초군을 격파했으나, 성보(城父)에서 초(楚)의 항연(項燕)이 반격하여 이신의 군대를 크게 무찔러 진나라 도위(都尉) 7명을 죽이다. 기원전 224년결국 진왕이 왕전(王翦)을 다시 기용하여 60만 대군을 동원해 평여와 진(陳)을 함락시키고, 기(蘄)에서 초군을 대파하여 항연을 죽였으며, ..

여적

처칠 옹이 서거할 때 사람들은 과연 처칠 다운 죽음이라고 경탄했다. 10여 일간 죽음과 싸운 것이 현대 과학으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이박사는 처칠보다 더 고령이면서도 처칠보다 몇십 배나 더 죽음과 싸우다 숨졌다. 이박사 앞에서는 죽음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박사는 반수(半睡)상태로 몇 년을 살았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아마 이박사의 반수야 말로 현대과학으로 해석이 안된다고 해야할것 같다. 물론 이박사의 타고난 정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의사 말에 의하면 이박사의 반수는 인삼을 먹은 때문이라고 한다. 이박사가 대통령으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많은 아첨배들이 산삼을 갖다 바쳤다. 심산유곡에서 수백년 된 산삼을 캐다 바친일이 여러번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