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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참수 경쟁

기타 관심사/전쟁 2013. 7. 7. 13:48 Posted by Lucidity1986

100인 참수 경쟁(100人斬首競爭)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에서 일본의 두 군인들이 누가 먼저 100인을 군도로 살해하는지를 겨뤘다는 사건이다.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 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패전 이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그리고 최후까지 자신들은 결코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으며, 신문 보도도 단순한 창작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도 무카이 소위의 딸과 노다 소위의 아내, 손녀가 현재 일본의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받으며 대법원에서 재판을 했으나 패소했다.


당시 신문 기사



이 100인 목베기 경쟁 외에도 300목베기를 달성한 다나카 군키치 육군 대위의 이야기도 1940년 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되었는데, 다나카 군키치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 두 소위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무카이, 노다 소위와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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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기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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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은 1997년 4월 3일 햄버거 가게 버거킹 이태원점에서 당시 홍익대학교의 학생인 조중필(당시 23세)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유력한 용의자로 당시 18세이던 미국인 두 명(패터슨,에드워드)을 검거, 재판 하였으나 용의자 두 명 중 한 명이 범인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두 명 모두 처벌하지 못하게 되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담당 검사의 과실로 용의자에 대한 출국 금지 연장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용의자 중 한 명인 패터슨이 미국으로 도주하여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현재 패터슨은 미국에서 구속된 상태이다.

 

1. 사건 개요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건 리(Edward Lee)와 혼혈 미국인 아더 패터슨(Arthur Patterson) 등 10대 남녀 20여명이 1997년 4월 3일 이태원의 한 건물 4층 술집에 모여서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배가 고파져 같은 건물 1층 패스트푸드점에 내려와서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혼혈 미국인 패터슨이 휴대용 칼(잭나이프)로 햄버거를 자르면서, 일행은 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후 일행이 밖으로 나가거나 4층 술집으로 돌아갔는데도, 패터슨과 패터슨의 친구인 미국 국적의 한국인 에드워드는 햄버거 가게 화장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친 조중필씨를 휴대용 칼로 9군데 찔러 살해했다. 이후 이들은 4층 술집 화장실로 가서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 패터슨은 미국 제8군 기지로 들어가 친구를 만나 바지를 갈아입고 피묻은 옷을 불에 태우고 범행에 사용한 칼을 버렸으나, 4월 4일 익명의 제보를 받은 범죄 수사대(CID)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4월 6일, 미국 출장을 다녀온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 패터슨이 TV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아들을 추궁했고, 아들이 범죄를 시인하자 변호사를 만난 후 4월 8일 검찰에 자수했다.

 

2. 사건 논란

 

18세에 불과한 청소년이 아무 이유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도 충격을 주었으나, 수사기관이 제대로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졌다. 수사기관에서 영어로 제대로 심문을 하지 못하면서 초기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잡힌 아더와 에드워드는 서로 상대방이 피해자를 살인했고 자신은 옆에 있기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SOFA협정으로 인해 용의자였던 미국인 두명과 관련된 사람에 대한 조사나 증인 신문에 차질이 있었다.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살인죄로, 아더는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고 흉기소지등으로 기소되었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1심에서는 에드워드의 살인혐의를 인정하였으나, 대법원에서는 에드워드에 대해 유죄라고 볼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죄라고 판결했다. 아더는 흉기 소지로 유죄가 확정된 뒤 항소를 포기하여 실형을 살다가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소하였다.

이런 와중에 법무부가 아더에 대한 출국금지 연장 조치를 취하지 않자, 출국금지기간 만료 사흘 만에 아더가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아더에 대한 신병확보 및 수사가 곤란해졌다. 이에 분노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했고 1심과 2심에서는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담당 검사의 과실과 유족들의 정신적 피해간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후 아더에 대한 기소를 유족들이 요구하였고,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영화가 개봉된 후 아더에 대한 재판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2009년 12월 15일 검찰은 법무부에 아더에 대한 범죄인 인도청구를 요구하였다. 이후 2011년 10월 아더가 미국 수사 당국에 구속된 상태라는 것이 알려졌다.

 

3. 사건 진행 상황

 

이태원 살인사건 이후 故 조중필씨의 어머니는 재수사 요구와 외국으로 도피한 유력 용의자 패터슨에 대해 출석을 요구했지만 법무부와 외교통상부 측에서는 줄곧 못 찾겠다는 답변을 할 뿐이고 사건은 지지부진해 왔다.

이후 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이 영화화되고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수차례 방송을 하는 등, 다시 사건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어 2011년 10월 10일 미국에 있는 유력 용의자 패터슨을 당국의 협조에 의해 검거하여 한국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되었다. 4개월전 패터슨은 미국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으며 패터슨에 대한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달아난 범죄자 아더 패터슨의 송환문제에 관해, 구금을 승인하며, 보석은 허용치 않는다'라고 하였다.

 

아더는 다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온 이후 출국했는데,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인지 여부에 대해 법조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만약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외국에 있는 경우'라는 입증이 없는 경우 즉,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은 경우에는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15년인 2012년 4월 초까지이다.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 2011년 12월중에 아더 패터슨을 기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검찰은 2011년 12월 22일 아더 패터슨을 기소했다.

 

미국에서 송환 재판을 담당한 검사(미국 검사)는 둘이 공범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한국검찰은 수사 결과 둘이 공범이며, 패터슨이 직접 살인을 했고, 에드워드가 이를 지시한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에드워드를 다시 기소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2012년 10월 로스앤젤레스 연방법원은 패터슨을 한국으로 송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패터슨은 11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 인신보호청원을 제출해 송환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됐다. 현재 LA 다운타운 연방구치소에 구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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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의사 모녀 살인 사건은 대한민국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대한민국 법 체계와 낙후된 법의학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사형 제도의 존폐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 일으킨 사건이다.

 

만 7년 8개월 동안 사형(1심, 1996년 2월) → 무죄(2심, 1996년 9월) →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대법원 상고심, 1998년 11월 13일) → 무죄(고법 파기 환송심, 2001년 2월) → 무죄(대법원 재상고심, 2003년 2월) 등으로 여러 차례 판결이 뒤집어졌다.

 

 

피고인 이도행 씨

 

 

1. 사건 개요

 

1995년 6월 12일 아침 서울특별시 불광동 모 아파트 ○○○씨 가족의 집에서 원인 모를 흰 연기가 새어나오자, 인근 주민이 바퀴벌레 약을 뿌리는 줄 알고 경비실에 항의했다. 경비원 조 모씨가 단지내 전화(인터폰)로 연락을 해도 대답이 없자, 오전 9시 7분경 철제 방범창을 뜯어내고 내부를 살폈다. 그제야 화재 때문에 연기가 발생했음을 발견한 경비원이 소방서에 신고하였고, 오전 9시 30분경에 도착한 소방관들은 10여 분 만에 불을 껐다.

 

소방관들은 현장을 살펴보다가 치과 의사였던 부인(당시 31세)과 딸(당시 2세)이 죽은 채로 욕조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이 발생한 날은 남편(당시 33세)이 개인 외과병원을 개원하는 날이었고, 당시에는 출근한 상태였다. 화재는 안방의 장롱에서 시작되었으며 장롱 등만 태웠을 뿐 크게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훗날 이 화재는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재판 과정

 

남편은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1995년 9월 2일 구속되었다. 검찰(담당검사:안원식,박상우) 측의 주장은 남편이 출근하기 전인 오전 7시 이전에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범행 시간 추정 등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시신을 물에 담근 다음, 서서히 불이 타도록 장롱에 불을 지르고 출근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남편이 출근한 오전 7시 이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목격자도 없고 지문, 혈흔 등 직접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결국 이 사건은 실제 사망 사건이 언제인지, 불은 언제 질렀는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단서들을 수집하는 초동 수사에 있어 많은 허점을 보였다. 일례로 발견 당시 사체와 욕조 물의 온도를 재는 기본적인 조사조차 시행하지 않아, 살해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놓치기도 했다.

 

결국 변호인단은 스위스법의학자 크롬페셔 교수를 증인으로 내세워 검찰에서 주장한 법의학적 자료는 증거 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밝혔고, 모의 화재 실험에서도 화재가 오전 7시 이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였다. 결국 이런 정황들이 모두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남편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현재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한국판 OJ심슨 사건으로 회자되기도 했는데, 간접 증거와 정황 증거 등으로 볼 때 남편이 범인이라는 심증은 충분하지만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무죄로 풀려난 OJ심슨과 유사한 사건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사건 초기 법의학적인 증거 수집이 미흡하여 미해결 상태에 빠진 사례로 유명하다. 특히 언론에서도 냉정하게 사건을 접근하지 않고 '한국판 OJ 심슨 사건'이라며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은 결국 1996년 듀스 김성재 사망 사건과 같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사가 필요함을 시사해 준 사례로 남게 되었다. 본 사건의 2심 재판부터 최종 대법원 재상고심 재판까지 변호를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한 남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8년간의 지루한 싸움은 승리로 끝났으나 '이것이 정말 승리일까? 남자는 정말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소회를 밝혔었다.

 

3. 무죄 용어에 대한 비판

 

'무죄(無罪)'의 의미가 '죄가 없음'으로 인해 용어의 부적절성을 지적한다. 증거재판주의 제도 아래에서는 수사 중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변호인들의 증거 무효성 주장에 대해 검사가 이를 방어하지 못하면 '무죄'의 판결이 성립된다. OJ심슨 사건이나 이번 사건처럼 심증적으로 살인의 동기가 충분하고 정황상 명백하더라도, 미숙한 대처로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증거의 유효성 입증에 실패하면 '죄가 없음'이 되는 것인 바, 이는 단지 '유효한 물증이 없어서 형벌을 논할 수 없는 것' 뿐이지 이미 사망한 피살자 외에는 그 누구도 '진실'을 판단할 수 없음에도 '무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은 실제적 진실을 바탕으로 결백을 인정한 판결로 오해할 소지가 계속 남아 있다. 실제로도 대법원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확정된 살인 사건이 나중에 실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 <- 출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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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하바라 살인 사건(2008)

기타 관심사/사건사고 2013. 5. 9. 22:01 Posted by Lucidity1986

아키하바라 살인 사건 (일본어: 秋葉原通り魔事件 아키하바라토오리마지켄, 아키하바라 괴한 사건)은 2008년 6월 8일 일본 도쿄 도 지요다 구아키하바라에서 발생한 무차별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1. 사건 개요

 

2008년 6월 8일 12시 30분, 도쿄 도 지요다 구 소토칸다 지역의 교차로에서, 2톤 트럭 차량 한대가 신호를 위반하고 돌진하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5명의 보행자를 들이받았다.

그 뒤 이 트럭은 교차로를 지나 맞은편 차선에서 신호대기하고 있던 택시와 접촉사고를 내고 정차하였다. 트럭을 운전하고 있던 용의자는 차에서 내려 다친 보행자에게로 접근하고 있던 행인과 경찰관 14명을 소지하고 있던 등산 나이프로 연달아 찔렀고, 사건 발생 5분 후, 만세이바시 경찰서 아키하바라 파출소로부터 출동한 경찰관이 용의자를 추적해 경봉으로 대응한 뒤, 마지막에는 권총으로 남자를 제압하였다.

 

사건 당일은 일요일 오후시간 대로, 보행자 천국(차 없는 거리)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며 관광 및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사건 직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하거나, 일부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하였고, 부상자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등 사건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12시 36분 최초로 신고를 받은 도쿄 소방청은 일반적인 교통사고로 보고 구급대와 소방대 각각 1대씩 출동시켰으나, 신고가 잇따르자 지휘대 1대와 구급대 4대를 더 출동시켰다. 12시 43분에 최초 구급대(아사쿠사 소방서 아사쿠사바시 출장소)가 도착했지만, 통상적인 대처로는 무리라고 판단, 재해파견 의료팀(DMAT)를 출동시켜 구조를 진행시켰다.

 

이 사건은 무차별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되어 일본 역대 최악의 참사라고 불릴 만큼, 일본 사회를 충격속으로 몰아넣었다. 사건 당시 시행중이던 보행자 천국은 그 뒤로 무기한 중지되었으나, 2011년 1월 23일 보안설비와 경비인력을 대폭 강화하여 다시 재개되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용의자는 가토 도모히로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 였으며, 얼마전까지 생활고에 시달렸던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생활에 지쳤다. 세상이 싫어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아키하바라에 왔다. 누구라도 좋았다”며 범행동기를 진술하였다. 당시 사고를 당한 보행자들은 보행자 천국(차 없는 거리)으로 도로가 통제되길 기다렸다가 통제된 이후 교차로에 진입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등산 나이프에 찔려 사망한 무토 마이는 근처 편의점 앞 휴대폰 가판 아르바이트 도중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구하려고 나왔다가 변을 당한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2011년 2월 2ch 인터넷 게시판에서, 2011년 2월 11일 신주쿠 역 신남쪽출구(新南口)에서 3명이 무차별살인을 저지르겠다는 글이 올라와 한차례 물의를 빚었다. 해당 글을 올린 범인은 15세 중학생으로 "얼마나 떠들어댈지 보고 싶었다"며 범행동기를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2. 피살자 명단

 

  1. 나카무라 가쓰히코(中村勝彦, 당시 74세, 전직 의사)
  2. 고이와 가즈히로(小岩和弘, 당시 47세, 회사원)
  3. 마쓰이 미쓰루(松井満, 당시 33세, 요리사)
  4. 미야모토 나오키(宮本直樹, 당시 31세, 회사원)
  5. 무토 마이(武藤舞, 당시 21세, 대학생)
  6. 후지노 가즈노리(藤野和倫, 당시 19세, 대학생)
  7. 가와구치 다카히로(川口隆裕, 당시 19세, 대학생)

3. 재판과 집행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가토는 '세상이 싫어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시즈오카에서 아키하바라까지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아키하바라를 몇 차례 사전 답사도 했다고 한다. 가토는 비정규직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을 무선 인터넷을 통해 표시해 왔으며, 조사 중 '센다이와 쓰치우라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쓰치우라의 사건'은 2008년 3월에 가나가와 마사히로가 일으킨 도리마 사건을 가리키며, '센다이의 사건'은 2005년 4월 2일오토모 세이지가 일으킨 차량 폭주 사건을 가리킨다. 실제로 가나가와는 가토가 자신의 범행을 본따 칼을 흉기로 사용하였음을 기뻐하기도 했다.

 

2010년 1월 28일, 도쿄 지방법원에서 무라야마 히로아키 재판장(村山浩昭)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가토는 체포 당시의 당당하고 담담히 경찰 조사를 받던 태도에서 반성, 사과하는 모습으로 변화된 태도를 보였다. 3월 9일 열린 네번째 공판에서는 최초로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증인심문이 이루어졌고, 피해자들은 가토에 대한 사형 선고를 강하게 요구했다.

 

7월 27일 열린 제16차 공판에서 가토는 범행의 동기에 대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고 싶었다고 술회하며 그 배경에는 굴욕적이기까지 한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이 있었다고 밝히며 실제의 사례를 소개했다. 공판에 앞서 비공개로 열렸던 가토의 부모에 대한 심문에서 가토의 어머니는 해당 사례들을 인정했고, 아버지는 이에 대해 자신은 자식 교육에 대해 관여할 수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2011년 3월 24일, 도쿄 지방법원은 가토 도모히로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항소했으나 2012년 9월 12일 2심인 도쿄고등법원 재판부 역시 사형을 판결했다. 동해 9월 25일 가토 도모히로의 변호인은 정신 장애를 이유로 상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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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여행하며 우주의 과거를 가상으로 알아보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이다.

사진은 아직 출발 전 상공 100km의 우주의 모습





지구로부터 약 380,000km에서 공전하고 있는 달




온실 효과로 인해 섭씨 500도에 육박하는 금성 표면의 모습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으로 온도가 -170~400도를 왔다갔다 하는 수성




그리고 지구 100만개를 합친것보다 크며 태양계 전체를 혼자 움직일정도로 거대하고 무거운 천체, 태양






아직도 외계 생명체 떡밥으로 지구인들을 낚고 있는 행성, 화성





태양계에서 가장 거대한 가스 행성, 목성



크고 아름다운 고리를 가진 토성



생성 초기에 어디서 얻어 터졌는지 자전축이 98도나 기울어져 있는 천왕성



푸른 메탄으로 가득찬 별 해왕성


해왕성과 반대 방향으로 공전하면서 해왕성의 강력한 힘에 결국 붕괴되고 말 처지에 놓인 위성 트리톤


태양계 행성 목록에서 얼마 전에 퇴출되고야 만 불쌍한 명왕성

산소와 메탄 가스가 고체로 되어 있어 자원을 획득하기에 용이하지만 온도가 영하 248도인 관계로 실현가능성이 낮다.




태양과 최대 1,300억 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2003년 새로 발견된 행성 세드나


-- 태양계 밖 --

스크롤의 압박이 있는 관계로 접었습니다. 더 보실 분은 더 보기를 클릭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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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이후 우주의 역사

기타 관심사/천문 2013. 5. 6. 02:03 Posted by Lucidity1986


  • 우주 나이 빅뱅 ~ 10-43초 : 플랑크 시간(Planck time)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계산된 물리학이 정의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단위. 플랑크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다.

플랑크 시간이란 플랑크 단위로 알려진 시간 단위로, 광자가 빛의 속도로 플랑크 길이를 지나간 시간을 말한다.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측정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단위이다.

이 시기의 우주는 약 10-33 cm정도의 크기였다.

당시 우주의 온도 약10^27도. 원자핵도 존재할 수 없는 온도로, 빛과 입자의 원료들이 뒤섞인 형태의 에너지만이 존재한다. 물리학의 4가지 기본 힘인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에서 중력을 제외한 나머지 3가지 힘은 이 시기에 대통일력으로 통합되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 시간을 대통일 이론 시대라고 부른다.

  • 우주 나이 10-35 ~ 10-32초 : 급팽창(Inflation)
이 시기에 우주는 짧은 시간에 지름기준 1043배정도, 부피로는 10129 배의 엄청난 팽창을 겪는다(지수 함수적 팽창 조건의 경우). 이러한 급팽창은 우주의 에너지가 상태를 바꾸는 일종의 상전이현상(수증기가 물로 바뀌는 것처럼 물질의 성질이 바뀌는 현상)을 겪으며 강력이 대통일력에서 분리되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우주 나이 10-32 ~ 10-4초 : 강입자의 시대(Hardron era)
쿼크로 구성된 최초의 강입자의 탄생. 위 쿼크와 아래 쿼크가 모여 양성자(up+up+down)와 중성자(down+down+up)가 탄생. (양성자=수소 원자핵)
우주의 온도는 100억도~1억도 정도까지 낮아진 상태로, 양성자간의 결합 작용, 즉 수소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환경이다. 그 결과로 전 우주에서 다량의 헬륨이 생성되었다.

  • 우주 나이 3 분 ~ 38만 년 : 입자와 반입자의 쌍소멸, 입자만 남게 됨
  • 우주 나이 38만 년 : 재결합(Recombination)
우주는 팽창하던 중 특정 온도(약3000도)까지 낮아지는 순간, 우주 전체에서 원자핵들이 자유전자와 결합하는 현상이 일어난다(재결합이라는 용어는 사실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우주 역사상 최초의 핵-전자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단위 부피당 입자수는 절반으로 줄고, 입자들과의 충돌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빛이 분리된다. 이 때 방출된 빛은, 우주 팽창에 역행하며 우주의 역사에 해당하는 시간동안을 움직여, 지구에 도달한다. 이 빛은 매우 큰 적색편이를 겪어 우리에게 미미한 에너지를 보이는 복사로 보인다. 이 때 방출된 전파는 지금도 텔레비전을 틀었을 때, 없는 채널일 경우 잡히는 화면에 노이즈 형태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예측된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 불렀다.




  • 최초의 별(first star)과 은하의 생성
당시 우주에 존재하던 원소들인 수소와 헬륨이 매우 많이 밀집된 곳에서 태양 질량의 수백 배에 이르는 무거운 별들이 탄생. 이 무거운 별들은 100만 년 정도의 짧은 수명이 지난 후 초신성 폭발과 비슷한 큰 폭발로 최후를 맞으며 자신이 핵융합을 통해 생성한 무거운 원소들을 우주에 뿌렸다.

  • 우주 나이 38만 년 ~ 4억 년 : 암흑의 시대(Dark Era)
비슷한 시기에 생긴 별들이 비슷한 시기에 폭발로 우주에 에너지를 방출하자, 그 에너지가 재결합 때 이루어진 양성자와 전자의 결합을 분리시켰다. 이로 인해 수억 년간 별과 은하를 만들지 못하는 시기가 지속되었다.
  • 우주 나이 4억 년 ~ 137억 년 : 항성 / 은하 / 성운 / 행성 등의 발달
  • 우주 나이 137억 년 : 현재의 우주






우주의 미래

가설 a. 빅 크런치

파일:Big Crunch.gif

빅 크런치(Big Crunch)는 물리우주론에서 우주의 시작인 빅뱅(Big Bang)과 반대로 온 우주가 블랙홀의 특이점과 같이 한 점으로 축소되면서 종말한다는 가설이다.

우주 전체의 질량이 우주가 팽창하는 에너지보다 클 경우, 우주는 그 자신이 가진 중력에 의해 일정수준까지 팽창한 뒤 수축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수축하는 우주는 결국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게 된다.


플랑크 길이보다 작게 수축한 우주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일반 상대성 이론 이외에 양자역학적인 효과를 고려해야한다. 이와 관련된 이론을 양자 중력 이론이라고 하는데, 아직 양자 중력 이론은 구축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빅 크런치가 일어날 경우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물리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


빅 크런치 이후 우주가 다시 팽창할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과학자도 있다. 뫼비우스의 우주?


가설 b. 대소멸(Big Rip): 현재로부터 200억 년 후


우주의 밀도가 임계밀도 보다 낮아 우주가 계속 팽창하게되어 암흑물질이 작용해 초은하단 부터 행성계까지 다 해체시켜 놓는다. 우주가 매우 빠르게 팽창하게 되어 은하, 항성, 행성, 분자, 원자,아원자 입자등 모든 물질이 찢어지게 된다는 가설이다. 


가설 c. 대결빙(Big Freeze): 1014 년부터 그 이후

  1. 축퇴 시대(1000조 년 ~ 1040년)
    항성 형성 중단(1000조 년(=1014년)-
    1000조 년 뒤면 수소가 핵융합 반응으로 다 사라져 별이 형성되지 않게 된다. 가장 오래 살아남는 별은 적색 왜성으로 이것도 100조 년이 지나면 소멸한다.

    행성의 태양계 이탈(1015년)-
    두 항성이 서로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행성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항성이 그 정도까지 접근하려면 평균적으로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은하 붕괴(1019년 ~ 1020년)
    - 천체가 서로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역학적 에너지를 교환하게 되는데, 질량이 작은 천체가 에너지를 얻게 된다. 결국 작은 천제부터 시작하여 은하를 벗어나게 된다.

    궤도 운동의 소멸(1020년)-
    중력 복사로 인해 궤도 운동이 불가능해진다.

    핵자의 붕괴 시작(1032년)-
    대통일 이론에 따르면 양성자는 붕괴 한다는것으로 밝혀졌다. 양성자는 광자와 렙톤으로 붕괴하고 홀로 남은 중성자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몇 분 내로 붕괴된다.

    핵자 붕괴의 끝(1040년)-
    이 시간이 되면 모든 핵자가 붕괴하게 되어 남는 것은 적은 양의 렙톤, 광자와 블랙홀뿐이다.

  2. 블랙홀 시대(1040년 ~ 10100년)-
    1040년이 되면 블랙홀이 우주를 지배하게 된다. 블랙홀은 호킹 복사를 통해 질량이 작은 것부터 소멸하기 시작하고 10100년이 지나면 초질량 블랙홀마저도 소멸한다.

    주 - 블랙홀의 증발

    블랙홀의 온도가 외계보다 높은 경우 열복사를 하며 질량을 잃어 증발하게 된다. 이것을 호킹 복사라고 하는데, 현재의 우주 온도인 2.7K에서는 달 질량 정도의 작은 블랙홀만 증발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가 팽창하여 우주의 온도가 60n(나노)K까지 내려갈 경우, 질량이 항성 정도인 블랙홀도 증발한다. 온도가 10-19K까지 내려갈 경우 질량이 은하 규모인 블랙홀도 증발하기 시작한다. 은하 규모의 거대한 블랙홀이 증발하기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크기가 지금의 1019배 정도가 되어야하며,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7300억년 정도로 추정된다.

    블랙홀이 증발하기 시작하더라도,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질량이 태양 정도인 블랙홀의 증발시간은 약 1067년이다. 증발에 걸리는 시간은 블랙홀의 질량의 3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은하 규모의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하기까지는 약 10100년이 소요된다.


  3. 암흑 시대(10100년 ~ 영원히)-
    블랙홀이 소멸하고 난 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아주 적은양의 광자와 렙톤뿐이다. 우주는 계속 식어가 0 켈빈에 도달하고 어떤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열적 죽음 상태에 들어간다.

    물리학적으로는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상태가 바로 열죽음이다. 우주의 열역학적 종말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소립자로 분해되어 흐릿한 우주가 되어버리고, 광막한 공간에 소립자만 어지럽게 돌아다니게 된다. 열사에 대한 가설은 윌리엄 톰슨의 1850년대 아이디어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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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폭풍 작전

기타 관심사/전쟁 2013. 5. 1. 02:50 Posted by Lucidity1986

뤼순의 해군 기지를 점령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육전대 병사들

뤼순의 해군 기지를 점령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육전대 병사들

 

날짜 : 1945년 8월 9일~20일

교전국

일본 제국/만주국/몽강국 vs 소비에트 연방/몽골 인민 공화국

병력

일본군+만주국군+몽강국군 1,250,000명/포 6,700문/차량 1,215대/전차 1,000대/항공기 1,800대

vs

소련군+몽골군 1,593,255명/포 26,137문/차량 1,825대/전차 3,704대/항공기 5,368대

 

 

8월 폭풍 작전 또는 만주 전투(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 連対日参戦 (れんたいにちさんせん))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으며, 소비에트 연방만주국을 멸망시켰고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 등의 일본 제국의 북방 영토를 빼앗아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만들었다. 소련군은 만주38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몽강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모스크바 표준시로 5월 9일 0시 43분)에서 3개월이 지난 8월 9일에 이루어졌다. 8월 6일 히로시마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0,000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1. 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년 4월에 일-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년 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1,000,000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8월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을 부여했다. 그러나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월 8일 오후 5시(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은 8일 오후 11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일 불가침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월 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2.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 부대가 꾸준히 차출당하고, 신규 편성 부대 등으로 그 공백을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1945년 8월 당시 관동군은 31개 사단, 12개 독립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보병이었고, 31개 사단 중 25개 사단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750,000명에 이르는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29,000,000 명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대싱안령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제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3. 소련군의 공격 준비

스탈린만주 공격을 위한 총 책임자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소련군은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전략방면군을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는 바실렙스키가 취임했다.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제1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제2극동전선군에는 전 칼리닌전선군 사령관푸르카예프 상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유마셰프 해군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년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4. 전개

소련군블라디보스토크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제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월 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월 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다.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 중부의 개성시(8월 23일 진주, 9월 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38선 이북으로 철수)과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권 안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5.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괴뢰 국가만주국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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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폴 작전

기타 관심사/전쟁 2013. 5. 1. 02:40 Posted by Lucidity1986

다운폴 작전(영어: Operation Downfall)은, 연합국일본 제국 내지를 침공하기 위한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이 계획은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 폭탄 투하일본의 항복, 8월 폭풍 작전으로 인한 소련의 침공으로 중단되었다. 이 작전은 올림픽과 코로넷으로 나뉘었다.

1945년 8월에 시작하는 이 작전은 올림픽은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일본 남부의 규슈 섬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그 후, 1946년 봄의 코로넷 작전은 혼슈 섬도쿄 근처 간토 평야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다. 올림픽 작전에서 점령된 규슈 섬의 토지를 이용해 공중 지원을 하기로 예정되었다.

일본의 지리뿐 아니라, 일본 침략 계획은 매우 명로하여 그들은 정확하게 연합군의 침공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케수고 작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일본인은 규슈 점령 후, 작은 구역에서 방어 계획을 세웠다.

사상자 예측은 광범위하지만, 일본 민간인의 저항 정도에 따라서 예측은 연합군 사망자가 수백만 명으로 예측되고, 그리고 일본인 사망자도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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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1636)

기타 관심사/전쟁 2013. 5. 1. 02:24 Posted by Lucidity1986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에서 1637년 1월간에 과 조선이 한 전쟁으로, 홍타이지조선에 제2차로 침입하여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최대 패배인데 고려 무신정권은 대몽(對蒙) 항쟁을 40여 년간 지속하였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이나 버텼는데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이 굴복하여 끝났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와 국가 간에 한 전쟁이므로 '호란'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1. 개요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로서 맹약한 조선은 강화조약을 하고서도 친명배금 정책을 견지하였다.

당시 으로 국호를 고친 숭덕제 홍타이지는 대명(對明) 전면전 전(前)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고 기근으로 말미암은 경제상 위기를 타개하려고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키려 했으며, 1636년 12월 10만 대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정벌했다.

이들에게서 도망쳐 남한산성으로 조정을 옮긴 인조는 대항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말미암아 대배하고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면서[찧으면서] 굴욕스럽게 항복하였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비롯한 수십여 인이 에 포로로서 끌려간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청군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무시하고 쾌속 진격하여 인조를 생포만을 목표했으므로, 임진왜란과 달리 단기전으로 끝났으나 수십만 인이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가 황폐화하는 등 그 피해는 매우 큰 데다가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소중화를 자처하하면서 을 떠받들던 조선 조정은 엄청난 공황(恐惶)에 빠지고 크게 충격받았으며, 이후 군담소설인 《임경업전》이나 《박씨전》의 소재가 될 정도로 조선인은 정신상 상처를 입었고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정립된 과 조선의 역학관계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대조선(對朝鮮) 종주권을 포기할 때까지 약 250여 년간 계속되었다.

 

2.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이 몽골에 침략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이 사람들은 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걸출한 인물인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여진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는데 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갔고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누르하치가 대전(對明戰)을 선포하고 공격해 수세에 몰리자 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여 화평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1623년 서인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 대조선(大朝鮮)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3. 전쟁 발발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0만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한 사실은 한성에 12월 12일에 알려진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군해 있었다. 청군의 남하 소식을 듣고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청군의 진군 속도가 빨라서 시간이 부족하자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4.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초집(抄集)하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別動隊)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가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쳐 몰래 보낸 글을 받았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월 2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西)에 있는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邀擊)했다. 근왕군은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도절시진(刀折矢盡)했고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를 위시해 지휘관 다수 전사했으므로 더는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8일 강원도 금화 부근에서 청군과 한 전투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 온 청군을 격퇴(擊退)에는 성공했으나 도절시진(刀折矢盡)하여 부득이(不得已) 퇴각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29일 병력 6000여를 초집(抄集)한 그 남자는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조우(遭遇)했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불가부득(不可不得) 수원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배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撤收)하였다.

4-1. 쌍령 전투

일변(一邊)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를 놓고 이론(異論)할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 병사들을 저지(沮止)하려고 인근(隣近) 불당리에 매복(埋伏)하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 칼과 창을 주 무기로 삼아 최후 돌격 단계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구실을 하는 병사 1천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 3백 기(騎)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조총으로 중무장한 8천여 조선군은 겁먹은 채 거리(距離)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토붕와해(土崩瓦解)시키고 허완도 도할(屠割)한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분투(奮鬪)했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했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둔진(屯陣)하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5. 기근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 데다가 그 진격 속도가 매우 신속했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군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다는 소문(所聞)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도 청군의 별동대에 격파당하여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고 청군을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이 청군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무력(無力)을 없애지는 못했으며, 조선군은 당초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군사 1만2천과 백성 수만을 지탱(支撐)할 비축(備蓄)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호한(冱寒)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饑饉)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續出)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하려고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筆頭)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激烈)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물자 부족 탓에 지속(持續)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口徑)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天惠)의 요새(要塞) 남한산성 벽을 타격(打擊)했고 직결(直結)하는 피해는 작았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소현세자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한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이것으로써 확실히 꺾이고 말았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6. 항복

항복할 한 화약(和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隻)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조선 백성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봉림대군의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세칭(世稱)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이다.

한양은 종로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掠奪)과 방화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는 노력을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北伐)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과 연락하여 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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