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폴 작전(영어: Operation Downfall)은, 연합국이 일본 제국 내지를 침공하기 위한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이 계획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 8월 폭풍 작전으로 인한 소련의 침공으로 중단되었다. 이 작전은 올림픽과 코로넷으로 나뉘었다.
1945년 8월에 시작하는 이 작전은 올림픽은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일본 남부의 규슈 섬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그 후, 1946년 봄의 코로넷 작전은 혼슈 섬의 도쿄 근처 간토 평야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다. 올림픽 작전에서 점령된 규슈 섬의 토지를 이용해 공중 지원을 하기로 예정되었다.
일본의 지리뿐 아니라, 일본 침략 계획은 매우 명로하여 그들은 정확하게 연합군의 침공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케수고 작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일본인은 규슈 점령 후, 작은 구역에서 방어 계획을 세웠다.
사상자 예측은 광범위하지만, 일본 민간인의 저항 정도에 따라서 예측은 연합군 사망자가 수백만 명으로 예측되고, 그리고 일본인 사망자도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될 것이었다.
1. 계획
다운폴 작전의 미군 지휘관 책임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제독 체스터 니미츠와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제독 어니스트 킹, 윌리엄 다니엘 레이히와 육군 장군 조지 마셜, 미국 육군 항공대의 핸리 H. 아놀드였다.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는 미군 총사령관으로써 다른 최고급 임원 이상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 까지 비공식적인 토론만 하였다.
당시,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은 고위 관료 몇몇만 알고 있는 최고 비밀로써 일본 침략 초기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원자 폭탄이 일단 사용이 가능해지고 충분한 병력을 생산할 수 있다면, 마셜 장군은 침공을 위해 그 것을 사용할려고 하였다.
태평양 전쟁 전반에 걸쳐, 유럽 전역과 달리 연합군은 총사령관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지역별로 나뉘었는데, 예를 들어 1945년에 체스터 니미츠는 연합군 C-C 태평양 지역이었고, 더글라스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지역이었다.
통일된 명령은 일본 침공을 위해 필요했다. 군간 알력은(미국 해군은 니미츠를 원했지만 실제로는 맥아더가 지휘) 계획에 참견을 하고 위협적으로 심각했다. 궁극적으로, 해군은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상황적으로 필요할 때 맥아더가 지휘를 하게 하였다.
2. 고려 사항
계획자가 생각해야 하는 고려 사항은 시간과 연합군의 사상자, 그리고 빠른 일본 항복 유무였다. 이전의 1943년 퀘백 회의에서, 영미 공통 기획팀은 일본 본토 침략을 가정("일본 패배에 대한 이해와 계획")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연락도 하지 않았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전쟁을 연장하는 것은 국민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대신, 퀘백 회의에서 연합참모진은 독일 항복 이후 하나 이상의 항복 강요 작전에 대해 합의했다.
미국 해군과 공군은 일본에 대한 봉쇄로 항복을 촉구했다. 그는 인근의 조선이나 상하이 등을 점령하여 항공 기지로 이용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며, 미국 육군 항공대는 일본에게 폭격 예정지 전단을 내렸다.반면, 미군은 침공을 하지 않는 이러한 전략은 '무한정 전쟁을 연장'하며 불필요한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해군이 제안하는 측면 공격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 본토로부터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궁극적으로, 육군 관점이 승리했다.
육체적으로, 일본 본토로의 위풍당당한 목표를 제시하고, 바다를 매개로 한 침공에 유용한 해변을 지정했다. 단, 규슈 섬(일본 최남단 섬)과 간토 지방의 해변(서남과 동남이 도쿄와 맞닿음)은 현실적인 침공 지역이었다. 연합군은 2단계로 침공을 계획했다. 올림픽 작전은 규슈 섬을 침공하는 작전이었다. 항공 기지 설립 후 항공기의 영역이 닿으면, 코로넷 작전으로 도쿄 만을 침공하는 작전이었다.
3. 가정
일본의 지형이 알려졌지만, 미군 계획자들은 그들은 옹호 세력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5년 초, 그들은 모든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음 가정을 주장했다.
- "점령 작전은 제국의 가용 군사력 뿐 아니라, 열광적인 적대적 시민들에 의한 저항에 부딪친다."
- "올림픽 작전 시행시, 남부 규슈에서의 3개 사단과, 북부 규슈에서의 3개 사단에 맞닥게 된다."
- "규슈에서의 작전에서, 총 적대 세력은 10사단을 넘지 않으며, 이 수준은 신속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 "코로넷 작전 시행시, 도쿄 근처에서 약 21개 사단과 관동 평야에서 약 14사단과 충돌하게 된다."
- "적군은 우리의 중화기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아시아 본토에서의 공군을 차출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 2천대에서 2,500대의 항공기 차출이 예상되는데, 이 상황에서 규슈에서 맞설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하다."
4. 올림픽 작전
규슈 섬을 침공하는 올림픽 작전은, X-데이라고 불리며 1945년 11월 1일 예정되었다. 통합 연합군 해군 함대를 포함하여, 42척의 항공 모함, 24척의 전함, 400척의 구축함과 호위함으로 구성되었다. 14개의 미군 사단이 초기 상륙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준비 거점으로는 오키니와를 사용하며, 목적은 규슈 남부 점령이었다. 이 일대는 나중에 코로넷 작전에서 이용할 거점이 될 것이었다.
올림픽 작전에는 파스텔 작전이라는 이름의 기만 작전도 포함되었다. 파스텔 작전은 일본의 참모 총장을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직접적인 침략 작전 대신 일본을 에워싸여 포격 작전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것은 타이완 섬, 중국 연안, 황해의 기지 점령이 필요했다.
제 21 공군의 역할은 주요 연합군으로서 일본 본토를 전략 폭격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전술 항공 지원은 극동 항공군 (미국)(FEAF)가 시행하여 제5 항공 부대, 제7 항공 부대, 제13 항공 부대가 시행할 예정이었다.
FEAR는 큐슈와 혼슈 남부에서 일본 비행장과 주요 교통로(예:간몬 터널)을 폭격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주요 침공 X-5일에, 다네가 섬, 야쿠 섬, 고시키지마 열도 등 주요 연안 섬 점령을 시작해야 했다. 오키니와 점령은, 본토에서 가까운 정박지 수립의 가치를 증명하고 상륙 해변으로의 수송과 공중 폭격 후 손상된 병력 수송을 위해 중요했다.
큐슈 공세에서, 미 제6군은 미야자키 시, 아리아케 시, 구시키노 시 등 이 세개가 목표 지점으로 설정되었다. 만약 큐슈 공세가 시작되면, 이 지점에서 4-5시에 시작되어 7시까지 끝마칠 것이다. 오스틴, 뷰익, 캐딜락 회사들을 통해 스튜드 베어켓을, 윈톤을 통해 링컨-제퍼를 수급받아 35개의 상륙 장갑차를 사용했다.[14] 각 상륙에 할당된 군단들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군사력 비는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되었다.
1945년 초, 근처 항구 아리아케가 방어되는 동안 미야자키는 거의 방비 상태에 있었다. 구시키노가 약하게 추천되었지만, 미국 해병대는 지형 특성 때문에 그 곳으로부터의 상륙은 거부되었다.
침공의 목표는 섬 전체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섬의 3분의 1이며 지도에서의 점선과 같이 "제한되어 있었다". 남부 규슈는 코로넷 작전에 필요한 준비와 운영에 중요한 기지를 제공할 것이었다.
5. 파스텔 작전
올림픽 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작전이었으며, 약 8만의 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것으로서 대규모 작전계획이었다.
6. 코로넷 작전
혼슈 섬과 간토 평야를 침공하는 코로넷 작전은 Y-데이라고 불리며 1946년 3월 1일 시작 예정이었다. 코로넷은 초기 점령을 위한 25개 사단과 그 때 당시 가장 큰 상륙작전이 일어날 예정이었으며, 초기 점령이 목적이었다. (오버로드 작전 당시에 비교하여, 그 때는 12개 사단이 상륙했었다.) 미국 제1군은 보소 반도의 쿠주쿠리 해변으로 상륙하고, 미국 제8군은 히라쓰카 시의 사가미 만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두 군대는 북쪽의 내륙인 도쿄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7. 이동
올림픽 작전은 태평양의 거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었으며, 영국 연방의 영국 태평양 함대를 포함하여 18척의 항공 모함(연합군 공군 전력의 25%)과 4척의 전함을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필리핀 전역의 오스트레일리아 제1 전술 공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군에게 일본 전역에서의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맡았다. 올림픽 작전을 위해 타이거 군은 긴 범위의 중폭격기로 구성되어 10편대로 유럽의 RAF 폭격 분대에서 오키니와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만약 올림픽 작전에서 증원이 필요하면 코로넷 작전에서의 병력을 이용할 수 있었고, 유럽, 남아시아, 호주에서의 병력으로 재배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제1군(15사단)과 미국 제8 공군은 유럽에 있었다. 미군의 재배치는 미국에서의 동원 해제로 인해 복잡해져서, 이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군인과 장교가 전역함에 따라 사단의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레이 스케이트에 의하면:
미국의 계획은 미군이 아닌 연합군의 육군은 관동 평야에 대한 침공 참여 가능성이 없었다. 이 계획에서 모든 전투, 예비 병력, 추가 증원은 모두 미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코로넷 작전의 계획은 1945년 끝여름으로 예상되고, 모든 주요 연합군은 병력을 제공하고 여러 토론에서 크기, 임무, 장비 등은 이들을 지원하고도 남을 정도의 높은 수준이었다.
호주 정부는 호주 육군의 1개 사단을 올림픽 작전에 지원하려 하였으나, 미국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서방 연합군 간의 협상에 따라, 코로넷 작전에서 호주 보병 부대와 영국 육군, 캐나다 육군으로 이루어진 영국연방 군단이 지원하기로 하였다. 지원팀에는 이 나라 뿐 아니라 다른 영국 연방 국가도 속해 있었다. 때문에 맥아더 장군은 언어, 조직, 구성, 장비, 훈련, 교리의 차이로 영국령 인도군을 제외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군단은 미국 군단의 지휘하에 있어야 하며 오직 미국 장비 및 군수품을 이용해야 하고, 작전 시행 6개월 전에 미국에서 훈련받는 것을 제안했다. 영국 장교인 대위 찰스 케이틀리는 영국연방 군단을 이끌 지휘관이 되었다. 호주 정부는 그 장교는 일본과의 전투 경험이 없음을 비판하며 장군 중위 레슬리 모르체드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단의 세부 사항이 정해지기 전에 전쟁이 끝났다.
8. 케츠고 작전
한편, 일본도 계획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1945년 여름에 미군의 본토 침공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 후 연합군은 태풍 시기로 인해 수륙 양용 상륙 작전이 위험하다 판단되어 다른 작전을 시행할 수 없었다. 일본은 침공이 일어날 장소로, 남부 규슈의 미야자키 현, 아리아케 해 또는 사쓰마 반도로 예상했다.
일본은 더이상 전쟁의 승리에 대한 현실적인 전망이 없었고, 일본의 지도자들은 연합군의 일본 정복 동의는 너무 대가가 크고 휴전보다는 전체적인 패배가 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계획은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으로 "케츠고 작전" (일본어:
9. 가미카제
제독 우가키 마토메은 1945년 2월 소환되어 규슈의 제5 해군 항공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제5 해군 항공대는 오키나와 침공과 관련된 함선에 대한 가미카제 공격인 탱고 작전에 배치되었고, 연합군의 규슈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여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일본의 방어는 가미카제 공격에 의존했다. 전투기와 폭격기 뿐 아니라, 품질이 나쁜 시험용 비행기도 이용하고 임무를 위해 거의 모든 훈련사가 동행되었다. 육군과 해군이 가진 7월 기준 1만 기의 항공기(10월에도 다소 있었음)는 침공을 위해 거의 모두 동원되었다. 우가키는 또한 규슈 해안 근처에서 연합군 함선을 공격하기 위한 소형 자폭 보트도 수백 척 생산했다.
2천기의 가미카제 전투기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시작하여 9척의 함선을 파손시켰다. 규슈는 더 유리한 상황(예:지형상 미국 레이더 효율 감소)로 인해 그들은 가미카제 공격이 미국 병력의 6분의 1 정도로 방어를 압도할 것이라 예상했다. 일본 항공기는 약 400척 이상의 함선이 좌초될 것이라 예상하고, 그들은 조종사 훈련 이후 표적을 순양함이나 구축함으로 바꾸어 사상자가 오키나와보다 더 컸다. 한 참모의 연구에서, 가미카제는 상륙 전 침공 부대의 절반에서 3분의 1 정도 파괴할 것이라 추정했다.[
10. 해군
1945년 8월, 일본 제국 해군(IJN)은 실질적으로 군대가 해체 직전이었다. 그들은 이용 가능한 군함이 오직 6척의 항공모함, 4척의 순양함, 1척의 전함만 있었다. 그들은 "20척의 작전 구축함과 40척의 잠수함이 바다에서 몇 일 동안 유지 중"이라고 말했다.
IJN은 결국 100척의 코루급 소형 특잠수함, 250척의 카이루급 소형 특잠수함, 400척의 가이텐 유인 어뢰, 그리고 800척의 신요를 생산했다.
11. 육군
모든 상륙 작전에서, 수비군은 두 가지 전략이 있는데, 하나는 해변에서의 방어 또는 종심방어이다. 전쟁 초기(타라와 전투의 예)에서는, 일본군은 해변에서의 강력한 방어를 전개했다. 이 전술은 함포사격지원 전술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 후반에, 팔라우 전투, 이오 섬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략을 전환하여 전략적인 위치에 병력을 배치하여 종심 방어를 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규슈의 방어를 위해, 해안에서 미군이 상륙한 후 거점을 만들기 전에 안전한 교두보를 확립하지 못하는 상황의 전진선인 약 몇십 킬로미터 내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반격은 멀리 돌아서 행하며, 주요 활동은 상륙에 대한 준비 이동이었다.
1945년 3월, 규슈에서 전투 사령부를 설치했다. 4개월 후, 일본 제국 육군은 만주국, 대한민국, 일본 북부 등에서 병력을 징집해 왔다. 8월, 일본군은 총 90만명의 14개 사단과 3 전차 여단을 모집했다. 일본군은 새로운 병사를 징집하기 쉬었으나 그들을 무장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8월에, 일본군은 65만명을 징집하나 충분한 장비는 40만명, 기본적인 무장도 30만명밖에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규슈 전투의 결과에 대해 이해 관계에 모든 결정을 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거의 그 곳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추정으로, 규슈의 병력은 탄약이 본토에 있는 모든 탄약의 40%가 있었다.
또한, 일본이 주관했던 전투 자원군은 남자 15-60세, 여자 17-40세까지 모집하여 총 280만명을 모았다. 무기, 교육, 훈련은 매우 부족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무강선 머스캣, 장궁, 죽창 등으로 무장했다.
징집되었던 한 고등학생 카사이 유키코는 스크래치 송곳으로 무장하며 "나는 미군을 죽이는 것이 목표다. ...(중략) 나는 복부를 목표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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