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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1636)

Lucidity1986 2013. 5. 1. 02:24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에서 1637년 1월간에 과 조선이 한 전쟁으로, 홍타이지조선에 제2차로 침입하여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최대 패배인데 고려 무신정권은 대몽(對蒙) 항쟁을 40여 년간 지속하였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이나 버텼는데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이 굴복하여 끝났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와 국가 간에 한 전쟁이므로 '호란'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1. 개요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로서 맹약한 조선은 강화조약을 하고서도 친명배금 정책을 견지하였다.

당시 으로 국호를 고친 숭덕제 홍타이지는 대명(對明) 전면전 전(前)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고 기근으로 말미암은 경제상 위기를 타개하려고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키려 했으며, 1636년 12월 10만 대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정벌했다.

이들에게서 도망쳐 남한산성으로 조정을 옮긴 인조는 대항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말미암아 대배하고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면서[찧으면서] 굴욕스럽게 항복하였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비롯한 수십여 인이 에 포로로서 끌려간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청군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무시하고 쾌속 진격하여 인조를 생포만을 목표했으므로, 임진왜란과 달리 단기전으로 끝났으나 수십만 인이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가 황폐화하는 등 그 피해는 매우 큰 데다가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소중화를 자처하하면서 을 떠받들던 조선 조정은 엄청난 공황(恐惶)에 빠지고 크게 충격받았으며, 이후 군담소설인 《임경업전》이나 《박씨전》의 소재가 될 정도로 조선인은 정신상 상처를 입었고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정립된 과 조선의 역학관계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대조선(對朝鮮) 종주권을 포기할 때까지 약 250여 년간 계속되었다.

 

2.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이 몽골에 침략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이 사람들은 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걸출한 인물인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여진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는데 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갔고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누르하치가 대전(對明戰)을 선포하고 공격해 수세에 몰리자 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여 화평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1623년 서인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 대조선(大朝鮮)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3. 전쟁 발발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0만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한 사실은 한성에 12월 12일에 알려진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군해 있었다. 청군의 남하 소식을 듣고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청군의 진군 속도가 빨라서 시간이 부족하자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4.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초집(抄集)하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別動隊)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가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쳐 몰래 보낸 글을 받았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월 2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西)에 있는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邀擊)했다. 근왕군은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도절시진(刀折矢盡)했고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를 위시해 지휘관 다수 전사했으므로 더는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8일 강원도 금화 부근에서 청군과 한 전투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 온 청군을 격퇴(擊退)에는 성공했으나 도절시진(刀折矢盡)하여 부득이(不得已) 퇴각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29일 병력 6000여를 초집(抄集)한 그 남자는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조우(遭遇)했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불가부득(不可不得) 수원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배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撤收)하였다.

4-1. 쌍령 전투

일변(一邊)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를 놓고 이론(異論)할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 병사들을 저지(沮止)하려고 인근(隣近) 불당리에 매복(埋伏)하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 칼과 창을 주 무기로 삼아 최후 돌격 단계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구실을 하는 병사 1천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 3백 기(騎)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조총으로 중무장한 8천여 조선군은 겁먹은 채 거리(距離)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토붕와해(土崩瓦解)시키고 허완도 도할(屠割)한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분투(奮鬪)했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했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둔진(屯陣)하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5. 기근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 데다가 그 진격 속도가 매우 신속했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군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다는 소문(所聞)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도 청군의 별동대에 격파당하여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고 청군을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이 청군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무력(無力)을 없애지는 못했으며, 조선군은 당초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군사 1만2천과 백성 수만을 지탱(支撐)할 비축(備蓄)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호한(冱寒)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饑饉)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續出)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하려고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筆頭)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激烈)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물자 부족 탓에 지속(持續)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口徑)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天惠)의 요새(要塞) 남한산성 벽을 타격(打擊)했고 직결(直結)하는 피해는 작았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소현세자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한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이것으로써 확실히 꺾이고 말았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6. 항복

항복할 한 화약(和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隻)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조선 백성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봉림대군의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세칭(世稱)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이다.

한양은 종로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掠奪)과 방화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는 노력을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北伐)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과 연락하여 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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