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있는 육군 제 31사단 포병단의 변소에서 타살된 사병의 시체가 발견된지 이주일만인 14일 범인이 체포되었는데 범인은 동 포병단의 기간사병인 김응규 병장이며 "소변보는 태도가 나쁘다"는 것이 구타치사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피살자 최용수 사병은 입소한지 5일만에 타살되었다는것인데 용변태도가 나쁘다는것이 발단이 되어 치사에까지 이른 군대 내 군기는 심심한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라고 아니할수없다. 더구나 근자에 들어와서 군수물자 보급품을 관리장교들이 부정착복하여 거액의 축재를 하고 있는 사실이 연이어서 드러나고 있어서 군 위신과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일개 사병의 사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군기 자체에 관련되느니만큼 이것이 문제시 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이는 입대를 앞두고 있는 적령자들의 징집률의 향상과도 직접 관련이 되는 것이다. 군대에서는 어느 단체에서보다도 그 규율이 엄해야 할것은 물론이고 엄정한 군기야말로 군의 생명이기도 한것이다. 따라서 상관의 명령에 대해서는 생사를 돌보지 않고 복종해야하는 군인정신이 강조되는 터이지마는 그래도 엄정한 군기가 혹독한 처벌과 혼동되어서는 아니된다.
계통을 밟은 정당한 명령은 여하한 곤란이 있어도 그 수행이 강요되어야 하는것이지마는 무리한 또는 자의적인 명령의 수행강요가 군기를 세우는 소이라고 착각되어서는 안된다. 봉건시대 군대에 있어서나 과거 일본군대 등에서 볼수 있었던바와 같이 무리하고 무모한 명령을 강행시킴으로써 철의 군기가 수립된다는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한 관념이 지휘급장교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특히 사병을 직접 다루는 상급하사관에 있어서 남아있어서는 안될것이며 기합이라는 일본군 용어가 아직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이는 터이다.
피살된 사병에게도 과오가 있었을지 모를일이지마는 상급자가 하급자를 타살하기까지에 이른 이 사건이 군기전반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되어야 할것이며 아울러 보급관계의 부정이 군자체로서 엄중히 단속됨으로써 고급장교가 사병들의 의식의 희생위에서 취리축재에 급급하다는 비난이 나오지 않게 되어 진정한 군기가 확립될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 조선일보 1958년 6월 18일
1. 사건의 성격: '소변 태도'가 부른 참극
- 사건 요약: 입대한 지 불과 5일 된 최용수 사병이 "용변 태도가 나쁘다"는 이유로 김응규 병장에게 구타당해 변소에서 시체로 발견됨.
- 시대적 배경: 일본군식 '기합' 문화가 잔존하던 시기, 신병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 '군기 확립'으로 오인되던 현장.
2. 주요 분석 포인트
① '기합'과 '군기'의 혼동: 일본군 잔재의 비극
기사는 "기합이라는 일본군 용어가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 시대착오적 관념: 무리하고 무모한 명령을 강행시켜야 '철의 군기'가 선다는 봉건적 사고방식이 하사관과 병장급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본질의 왜곡: 정당한 명령 복종과 '혹독한 처벌'을 구분하지 못하는 유치한 지휘 관념이 신병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분석입니다.
② 하층부의 '매'와 상층부의 '부정'
기사는 사병의 죽음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보지 않고, 당시 군 고위층의 부패와 연결합니다.
- 취리축재(聚利蓄財): 관리 장교들이 보급품을 가로채 부를 쌓는 동안, 정작 사병들은 굶주리거나(의식의 희생) 가혹행위에 시달리고 있다는 대비를 보여줍니다.
- 신뢰의 붕괴: 국민이 군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징집률 저하로 이어져 국가 안보가 흔들릴 것이라는 전략적 우려를 표명합니다.
③ 입소 5일 만의 죽음이 주는 함의
사회에서 갓 들어온 청년이 군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차가운 변소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군대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소변 태도"라는 지극히 사소한 트집은 가혹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1950년대 후반 군 내부 문제 구조
| 문제 지점 | 현상 | 기사의 비판 |
| 사병(하층) | 구타치사, 가혹행위(기합) |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한 관념의 산물" |
| 장교(상층) | 보급품 부정착복, 축재 | "사병의 희생 위에 세워진 부도덕한 권력" |
| 제도적 여파 | 국민 신뢰 하락, 징집률 저하 | "진정한 군기 확립을 위한 반성과 시정 요구" |
3. 시대적 맥락: '창군기'의 어두운 이면
1958년은 이승만 정권 말기로, 사회 전반에 부패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군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사병들에게 갈 쌀과 옷을 팔아 사익을 챙기는 장교들의 비위가 극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병들에게만 '강한 군기'를 강조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군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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