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God rest my soul

전체 글 2020

전국 모범지서 심사 공근지서가 제1위(1954년)

치안국 주최로 개최되었던 제2회 전국 모범지서 심사 결과 보고에 의하면 횡성군 공근지서가 영예의 제1위를 차지하고 있어 지난 13일 동 지서 광장에서 홍 강원도 경찰국장 참석리에 내무장관 상장수여식을 성대히 거행된바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 이병무 경사(횡성경찰서 근무) -경향신문 1954년 1월 22일

십만대군 추적북상!! 횡성 평창 접근·수도중심부돌입(1951년)

미군 4개사단을 포함하는 10만의 유엔군 대군을 20일 중부 한국회갈색저즌고지에 잠복하고 있는 중공군 및 북한괴뢰군을 공격하여 12리 이상을 전진하였다. 이 공격에는 미 제9 및 제10의 양 군단이 참가하였는데 그 전선은 54리에 이르렀다. 2일 전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로 시작된 이 도륙작전에 한국 진흙길을 북상하는 약 6만의 미군과 영국군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군 및 한국군이 참가하였다. 한국군 1개 사단은 산길을 따라 전진하여 38선남방 15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이에 대한 적의 저항은 산만하였다. 북한 괴뢰군의 일부는 공포에 사로잡혀 급속히 퇴각하였다. 또 다른 지점에서는 중공군이 산병호 내에서 전면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선에서는 공산군 약 4만이 배치되어있는데 여기에는 ..

금천부원군 박은의 졸기(1422년)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라났다.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 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여러 번 전임하여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임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할 때, 밖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치 성적이 제일이었으며, 좌보궐(左補闕)로 전임되었다가 태조 3년에 또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외람히도 어리..

익안대군 이방의의 졸기(1404년)

익안 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가 졸(卒)하였다. 이방의는 태조의 제3자요, 임금의 동모형(同母兄)이다. 개국(開國)·정사(定社)의 훈로(勳勞)에 참여하여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성질이 온후(溫厚)하고 화미(華美)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고, 손님이 이르면 술자리를 베풀어 문득 취하여도 시사(時事)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병으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는데, 임금이 자주 그 집에 거둥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어 위로함이 심히 후하였다. 졸(卒)함에 미쳐 임금이 심히 애도하고 친림(親臨)하여 전(奠)을 베풀고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철조(輟朝)하기를 3일 동안 하고, 상등으로 예장(禮葬)하고, 시호(諡號)를 안양(安襄)이라 하였다. 아들은 이석근(李石根)이니, 익평 부원군(益平府院君)에..

청해군 이지란의 졸기(1402년)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이 죽었다. 이지란은 동북면(東北面)의 청주부(靑州府) 사람이다. 옛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다. 타고난 천성이 순후(純厚)한데다 무재(武才)가 있었다. 일찍부터 태상왕을 따라 정벌하는 싸움터에 나가 승첩(勝捷)하여 마침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올랐다. 태상왕이 이를 대접함에 특별히 두터이 하고, 또 정사 좌명 공신(定社佐命功臣)을 주었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본토(本土)의 사람으로 타국(他國)에서 죽사온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德)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

문하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1392년)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太祖)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어육을 쓰지 않은 반찬)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성산)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경주 윤)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