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God rest my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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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 사형 집행(1948년)

수인(囚人) 8명이 또 사형대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졌다. 즉 지난 27일 오후 서울형무소에서 살인강도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되었던 송칠성(32), 서병선(39), 김덕선(47), 송득용(29), 임수룡(24), 황한주(32), 전광석(29)등 7명과 동일 대구형무소에서 강대엽(27) 1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다. 이로써 해방후 남조선에서 사형이 진행된 사람은 39명에 달한다 한다 그리고 이날 사형 현장에는 구경하러 온 여자 2명이 입회하였다는데 이것은 조선 사형사에서 처음보는 일이어서 그 강한 심장에는 놀라지안을수 없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31일

파출소에 연행된 만취 피의자 경찰관들 뭇매에 숨져(1977년)

14일 하오 9시 25분쯤 서울중부경찰서 을지로 2가 파출소 안에서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다 연행돼온 고택용씨(35/종로구 와룡동 1)가 중부경찰서 형사 1반 김종서 순경(40)에게 옆구리를 차이는 등 폭행을 당해 쓰러져 국립의료원으로 옮겼으나 15일 상오 4시쯤 숨졌다. 숨진 고씨는 서울중구 수하동 중소기업은행본점 뒷골목에서 채무관계로 친구 신진환씨(29/영등포구 구로동 214-6)와 시비를 벌이다 신씨의 머리를 담벼락에 대고 구타하고 있다가 순찰중이던 동부경찰서 형사 1반 이정일 순경(33)과 조횡구 순경(40)등 2명의 경찰관에게 잡혀 파출소에 연행돼갔었다. 고씨가 파출소에 연행돼서도 계속 고함을 지르며 자신을 연행한 두 형사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누워 "빚을 받으려는 사람을 무엇때문에 잡아 왔느..

시어머니 때려 치사 "악덕 며느리 벌 주라" (1965년)

29일 하오 4시경 서울 답십리동 184 김안성(70) 노파는 그의 며느리 김옥순(37)씨의 학대로 매맞고 냉방에서 앓다가 죽었다고 동민들이 서울 청량리 경찰서에 며느리 김 여인을 처벌해달라고 고발해왔다. 김 노파는 슬하에 장남 신재호(45)씨와 차남 신흥호(42)씨 등 2명의 아들이 있으나 평소 서로 어머니 모시는것을 거부하여 김 노파는 이집 저집으로 떠돌아다니던 중 지난 23일 경기도 장호원의 큰아들집에서 작은아들 집으로 돌아오자 작은 며느리인 김 여인이 시어머니 김 노파에게 "왜 벌써 왔느냐?"고 욕설을 퍼부으며 가슴 등을 마구 구타, 김 노파는 김 여인집 뒷방에서 앓다가 29일 하오 3시 절명했다고 동민들이 고발해온것이다. 그런데 김 노파의 시체는 시립동부병원에서 해부중이며 경찰은 악덕며느리 김씨..

상관의 매 맞고 절명(1963년)

지난 3일 현역 육군 중위가 통근차 운행을 거부한 운전병(상병)을 '명령불복종'이라 하여 구타치사케 한 사건이 21일 사망자의 친형 김언수(36=경북 상주군 상주읍 서문동 46)씨에 의해 밝혀였다. 김씨에 의하면, 지난 3일 새벽 5시쯤 육군 제213 건설공병대대 식당앞에서 본부중대부관 이현식(29)중위가 통근차 '스리쿼터' 운전병 김태수(25)상병에게 "급한일로 차를 타고가야겠다"고 했으나 김상병은 "수송과장의 명령 없이는 통근차량을 운행할 수 없다"고 하자 주먹으로 구타, 졸도 사망케 한 것이라 한다. 김상병의 사인은 4일 제5육군병원에서 '뇌출혈'로 진단이 내렸고 시체는 5일 유족에게 인계, 부대안에서 간략한 장례식을 치르고 화장했다 한다. 가해자 이중위는 제17범죄수사대에 살인 혐의로 구속되어 군..

하급생 구타치사(1962년)

19일 상오 10시 10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과 4년 백영철(27-유도 3단)군은 동교 체육관 옆에서 같은 체육과 3년 김봉길(26-유도 3단)군을 차렷자세로 세워놓고 '선배 대우를 하지 않는다'고 구타하였는데 얻어맞은 김군은 현장에 쓰러졌다가 경북대학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운반도중 사망하였다. 학우 2명과 함께 쓰러진 김군을 동 병원으로 운반하였던 백군은 김군이 사망한 것을 알자 곧 대구서에 자수했는데 이에 대해 계철순 경북대학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우 유감된 일이다. 내가 알기에는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기합을 넣다가 죽인 것이 아니고 사감으로 때린 것으로 보인다. 조사해서 가해자에 대한 조치를 하겠다." -조선일보 1962년 7월 20일

국회 구내에서 테로(테러)행위(1956년)

15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14일 하오 의원휴게실에서 자유당 감찰부 차장 이정재씨가 김두한의원(헌정동지회, 이하 헌)을 협박한 사실이 발생하였는데 그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신분을 침해한 것으로 용허될수 없으니 그 진상을 조사규명하고 책임을 추궁하기 위하여 각 파 비율로 '국회구내 테러행위 진상조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소선규위원(민주당, 이하 민)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한편 김선태, 김상돈 양 의원(민)으로부터 김성주 사건의 처리 방안 보고의 천연을 위시하여 각종 의안의 의사일정의 배정이 졸렬하다고 운영위원장을 힐난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조 운영위원장이 선처하겠다고 답변하였다. 그런데 국회 구내 테러행위 진상조사문제는 양일동의원(헌)으로부터 의원이 공무집행중 의사당 구내에 10여..

김두한에 사형을 언도 15명은 20년 이상 종신징역(1948년)

한때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대한민청 김두한 등 16명에 관한 군률재판은 지난 2월 12일에 끝났으나 군사위원들은 그 판결 내용을 발표하지 않어 그 결과에 대하여 일반은 매우 궁굼히 생각하고있던바 하-지 중장은 15일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엿다. 군사위원들은 2명의 살해 폭동 사형(私刑) 기타 신체에 대한 고문을 감행한 피고들에게 유죄를 판결하여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 피고들에게 유죄판결을 하여 김두한등 14명에게는 교수형 문화태 등 2명에게는 종신형을 언도하였는데 하-지 중장은 이상 판결문과 증거사실을 재심한 후 다음과 같이 감형을 선언하였다. 교수형 = 김두한 종신 = 김영태, 신영균, 홍만길, 조희창 30년 = 박기영, 양동수, 임일택,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송창환, 고경주, 김관철 ..

법정서 김두한 할복을 기도(1948년)

대한민청 사건의 책임을 지겠다고 고백한 김두한이 법정에서 할복을 기도하였다. 대한민청 사건에 대한 군정재판은 12일도 속개되어 오전 9시부터 최후적인 검사의 논고가 시작되어 엄벌에 처해야 되겠다는 대목에 이르자 김두한은 군정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외치면서 몸에 감춰가지고 있던 깡통조각으로 배를 세번 그었다. 이에 재판정은 일시 혼란을 이루었는데 이미 폐정이 되고 말았다. 김의 상처는 약간 뱃가죽을 벗겨 피가 좀 났을뿐 대단치는 않은 모양이라 한다. 이 재판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지 또는 게속될것인지에 관하여서 판사측으로부터는 아모런 발언도 없어 알길이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것으로써 재판은 끝났음으로 6명의 판사의 합의가 끝나는대로 하-지 중장의 결재를 기다려 수일내로 판결이 언도될 것이라 한다. -..

대한민청수사 테로(테러)사건 진상

지난 20일 오후 9시경에 남산동 2가 대한민청 연성도장 전동본원사본당에서 장택상씨의 직접 지휘 아래 급거 출동한 경찰대가 김두한을 비롯한 대한민청원 32명을 체포하고 시체 하나와 중경상자 8명을 발견하였다함은 기보한바와 같거니와 24일 수도청 발표에 의하면 동 시체와 부상자는 해방전부터 전기 김두한과 친히 지나던 사람으로 해방후 좌우익으로 갈리어 행동하게 되어 서로 감정을 품고 오던 중 19일 밤에 국제극장 앞에서 언쟁을 한것이 동기가 되어 20일 오후 2시경에 김두한 이하 수명이 전기 수명을 동연성도장에 납치한 후 동일 오후 5시반경까지의 사이에 구타한것이라는바 피해자 씨명은 다음과 같다. 사망 정진용(29)(익선동 166 태극흥업공사원) 중상자 김천호(29)(익선동 166=입원가료중), 장윤수(29..

김두한 등 언도 최고 징역 7년(1947년)

전 대한민청원 김두한 외 13명에 대한 상해치사죄에 관한 공판은 작 3일 오전 11시부터 심리원대법정에서 신언한 검찰관 입회 아래 이필빈 심판관 주심으로 개정되여 각기 다음과 같은 언도가 있었다. 김영태 징역 7년(구형 5년), 신영균 징역 5년(구형 4년), 홍만길 징역 2년(구형 1년), 김두한, 김두윤, 이ㅁ주(한자해독불가), 고경주, 주기현 벌금 2만원 조희창 무죄 기타 3명 1만 5천원 -조선일보 1947년 7월 4일

다방, 빠-의 폭한(暴漢) 종로서에서 8명 검거(1940년)

종로거리의 다방, 빠-는 "부량패"들이 우굴우굴 차한맘노코 마실수없다는 비난이 점고, 종로서에서는 이를 숙청하고저 눈초리를 노리고 잇던중 과연 작 12일 밤 관철정 흥아 빠-에서 야료를 치는 부내삼청정 36번지 무직 김두한 외 2명을 검거하고 다시 종로 2정모 경성다방에서 삼청정 63번지 이부귀(31)를 이의 한패인 명대흥아과 학생 이윤선(23), 전자동차운전수 김영범(28)을 청진정 63번지 1호 조선권번 기생 오금홍의 집에서 숨어잇는것을 검거하엿는데 이들은 종로 2정목 한양 빠-에서 손님들에게 폭역(폭력)행위를 가한것이다. 현재 도합 8명을 잡어들엿고 게속활동하야 부랑패의 소굴 '네온가'의 숙청을 철저단행할터이라 한다. -동아일보 1940년 7월 14일 해방전 기사라 철자나 맞춤법 등이 현재와는 많이..

피의자에 폭행(1960년)

8일 서울지방검찰청 황은환 검사는 취조중 수갑으로 피의자 얼굴을 때린 영등포경찰서 남한강 파출소 근무 박노운(35) 순경을 '독직 및 가혹행위'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박순경은 3월 25일 상오 6시 40분경 절도피의자 정윤선(26)을 연행 취조하다가 도망치려 한다고 수갑으로 얼굴을 때려 전치 2주일의 안면파열상을 입혔다는것인데 지난 26일 황검사의 유치장 감찰시에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피의자 정(鄭)은 그날 새벽 4시경 용산구 한강로 3가 40에 사는 김춘분씨 집에 침입하여 의류 수 점을 절취해오다가 박순경에게 불심검문을 받고 체포되어 지난 6일 절도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그런데 재판 검찰 경찰 기타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자가 그 직무 수행중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행인에 카르빈 난사(1966년)

12일 밤 11시 30분쯤 강원도 춘성군 서면 대동리 부락에서 대간첩 작전을 위해 파견중이던 육군00병기대대 26중대 소속 최금석(21/충남 금산) 하사는 잃어버린 군수품 때문에 부락 청년과 언쟁이 붙어 4명의 부락인을 카르빈 총으로 쏴죽이고 어린이 2명을 포함한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최하사는 사고 후 도주했는데 13일 상오 10시 사건 현장에서 1킬로 떨어진 화천에서 이마를 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최하사는 3명의 병사와 함께 파견근무중 10일 상오 9시 잃어버린 통일화(https://m.blog.naver.com/pjw9502/220837131956)와 비옷을 부락에서 발견하고 부락인을 도둑이라고 구타한 일이 있는데 이에 격분한 부락인들이 이틀이 지난 사고 당일 보복과 군 수사기관에 고발하려 ..

심야의 보초병 내무반에 카르빈 난사(1965년)

23일 새벽 1시반쯤 시내 동래구 안여동 소재 육군 제0경비중대 3소대 내에서 야간 보초중이던 이찬휘(23=경기도 의정부 호원리 외미63) 일병이 내무반에 들어가 직속상관인 "이영주 상병과 김철운 병장 나오너라"고 고함을 치면서 카르빈 약 30발을 난사, 잠자고 있던 강수복(27) 일병, 박노임(23), 최창식 일병 등 3명의 사병을 죽이고 나란히 누웠던 사병 김찬식 일병등 9명(중상 5명, 경상4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후 카르빈 총과 90발의 실탄을 갖고 도주했다. 군 당국은 사건발생 즉시 부산 시내와 경남도내 일원에 비상망을 펴고 군경 합동으로 범인체포에 나섰으나 이날 정오 현재 범인의 행방조차 파악 못하고 있다. 도주한 이일병의 '나의 부탁'이란 유서 1통이 사건현장에 있었다. 이 유서는 "김병장 ..

피서객에 사형(私刑) 해군사병들이 작당(1960년)

지난 2일 목포항에서 약 4km 가량 떨어진 육도해수욕장에서는 피서객들이 해군사병들에게 린치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해양훈련을 하고 있는 목포해군경비부 소속 손 선임하사외 2명은 이날 하오 6시경 김기호씨 등 7명을 사소한 시비끝에 그들의 천막으로 강제납치 야구방망이로 무수 구타하고 한시간 후에야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같은날 다른 해군 사병들도 이곳에서 문달수씨 외 3명을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동아일보 1960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