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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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당시 신문기사)/사형 집행 20

최병복 사형 집행(1966년)

유수남 군(5) 유괴살해범 최병복(31)피고에 대한 사형집행이 9일 하오 서울지검 주상수 검사 지휘로 서울교도소에서 집행됐다. 최는 지난 62년 2월 유군을 유괴, 대구에서 택시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병원으로 옮기는 중 유군의 팔을 꺾고 목을 졸라 죽인 후 운전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후 돈을 갈취한 혐의로 구속됐다. -경향신문 1966년 5월 9일

김정제 사형집행(1961년)

간첩죄로 지난 91년(*1958년) 10월 20일 대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김정제가 지난 7월 11일 공범 한영창, 오영근과 같이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26일 법무부에서 발표하였다. 김정제는 충남 보령 출신으로 해방 후 동대문경찰서장 내무부보안과장 경무과장 등을 역임한 자로서 동대문서장 당시 남로당 중앙당 특수부에 입당한 이래 4284년(*1951년) 7월 평양에서 밀파된 한영창으로부터 간첩지령문을 받고 간첩활동을 계속했으며 5.20 선거 당시에는 민의원으로 출마키 위해 자유당에 가입절차를 밟는 등 그의 기반을 공고히 닦고 괴뢰집단에 끊임없이 각종 정보를 무전으로 보고한 거물 간첩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1961년 7월 27일

이정재, 신정식 사형을 집행 (1961년)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이정재(45)와 신정식(33)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으로부터 형집행이 '확인'되어 19일 하오 3시 37분경 수감중인 서울형무소에서 교수로 형이 집행되었다. 신정식의 공범으로 인정되었던 김한용(36=전 순경)은 박 최고회의의장에 의하여 2년이 감형되어 '징역 5년'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최고회의공보실은 19일 상오 10시 40분 이 확인사실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혁재및혁검조직법' 제 9조의 2에의한 의장의 '형집행확인조치'인 것이며 혁명재판소 상소심 판결이 있은 뒤 처음으로 내려진 조치이다. 공보실은 박 의장의 확인조치가 취해진 시간이나 이, 신 두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 시간 등을 일체 밝히지 않고 다만 "사형의 집행은 24시간 내에 법의 절차에 따라 행하여질 ..

정국은 사형 집행(1954년)

앞서 군재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정국은에 대한 형집행은 지난 18일 하오 3시 30분경 서울 근교에서 실시되었다. 그런데 정에 대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검찰당국에 명하여 모종의 조사를 진행시킨 바 있다고 하는데 지난 17일 서상환 법무부장관이 경무대를 방문하고 동 조사 보고를 함으로써 사형집행 보류가 해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에 대한 '총살형 집행'은 처음 예정일이던 거월(*지난달) 23일 상오 10시경부터 돌연 '보도관제'가 실시된 이래 국방부 관계자 일동이 함구 부언하고 일체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해옴으로써 항간에 구구한 억칙만을 퍼뜨려 주고 있다가 예정일부터 25일 후에 돌연 비공개리에 이루어지고 작일 하오 5시에야 비로소 공식 발표가 있었는데 이것은 보도 관제가 실시된 이래 꼭 27일째의 ..

오열사형집행 윤홍중 등 4명(1952년)

적귀에게 아부하여 군사기밀등을 탐지하고 애국지사들을 다수 투옥 학살하던 간첩단에 대한 사형 집행을 8일 하오 2시부터 서울시 교외 모처에서 집행하였다. 그런데 전기 간첩단은 윤홍중(52), 주계범(25), 김현수(27), 김달만(26)등 4명으로써 남로당에 가입하여 6.25 사변 당시 애국자들을 적도들에게 밀고하고 투옥 학살케 하였으며 그후 9.28에 북상하여 괴뢰집단의 간첩훈련을 받고 다시 남하하여 아군의 군 배치 상황 및 화력 등을 탐지하던 자들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52년 11월 10일

나병자에 사형집행(1949년)

어린 아해(*아이) 간을 먹으려다 사형 집행을 받은 나병환자 즉 본적을 군산부 동암동 274번지에 둔 김영례(30)이란 여자는 3년전에 다시 문둥병이 재발하여 고생하던차 작년 10월 10일 하오에 같은동리에 사는 이총하의 아들 이은선(5)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압사시킨 후 면도칼로 배를 갈러 간을 먹을랴고 하다가 자기 남편에 발각되어 군산서원에 피검되어 군산지청에서 사형언도를 받었든것이다. 그런데 피고가 불복상고함에 고등법원에서 다시 재심하였으나 역시 사형 언도를 나림에 피고는 또 이를 대법원에 상고한 바 있었으나 4월 25일 상고가 각하됨에 지난 7월 9일 법무장관 서명하에 14일 드디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받은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21일

폭도 12명 사형 집행(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에 가담하였다하여 계엄지구 제1차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폭도 주모자 12명에 대한 사형집행은 예정보다 하로(*하루)늦게 지난 16일 하오 3시 광산군 지산면 게금산산록에서 군경 및 신문기자 입회하에 제5여단 사령부 군기대에의하야 집행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11월 19일

8명 사형 집행(1948년)

수인(囚人) 8명이 또 사형대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졌다. 즉 지난 27일 오후 서울형무소에서 살인강도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되었던 송칠성(32), 서병선(39), 김덕선(47), 송득용(29), 임수룡(24), 황한주(32), 전광석(29)등 7명과 동일 대구형무소에서 강대엽(27) 1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다. 이로써 해방후 남조선에서 사형이 진행된 사람은 39명에 달한다 한다 그리고 이날 사형 현장에는 구경하러 온 여자 2명이 입회하였다는데 이것은 조선 사형사에서 처음보는 일이어서 그 강한 심장에는 놀라지안을수 없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