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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당시 신문기사)/사형 집행

인혁당 관련 8명 사형 집행(1975년)

Lucidity1986 2022. 5. 30. 19:33
※ 주 : 이 사건은 당시 군사정권의 사법살인 사건이며, 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입니다.

 

지난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인혁당 재건단체 사건 관련자 도예종(50)등 8명이 9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비상군법회의 관계자에 따르면 형 집행에는 비상군법회의 검찰관, 서울구치소장, 제1육군교도소 군의관, 군목, 입회서기, 구치소집행단 등 6명이 관여했다.

집행에 앞서 인정신문과 1-2-3심 판결내용 확인절차를 거친 후 개인별로 유언을 청취했다. 그러나 사형수 대부분이 종교의식을 거부해 이 절차는 생략된 것으로 전해졌다.

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고 다른 7명도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연관된 것이거나 가족문제 등에 관한 유언을 했다고 관계관은 전했다.

이들 8명은 작년 4월 27일 긴급조치 1-4호와 국가보안법 반공법위반 및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혐의로 기소되어 작년 7월 8일과 9월 7일 비상보통군재와 비상고등군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었다.

군법회의법에 따르면 사형이 확정되면 국방부장관은 6개월 이내에 사형집행 명령을 내려야 하며 이 명령이 내린 후 5일 이내에 형을 집행하도록 돼있다.

이날 서울구치소는 오전 9시 30분 갑자기 평상의 면회업무를 중단한다는 공고문을 게시하고 일반면회객들을 돌려보냈으며 이때부터 주변에는 기동경찰대가 출동돼 삼엄한 경계를 폈다.

사형집행은 이때부터 시작돼 오후까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형이 집행된 8명은 다음과 같다.

도예종(50/삼화건설 회장), 서도원(52/무직), 하재완(43/무직), 이수병(37/삼락일어 학원강사), 김용원(39/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송상진(46/양봉업), 여정남(30/무직)

-조선일보 1975년 4월 11일

 

1. 사건의 성격: '판결 18시간 만에 이루어진 사법 살인'

  • 피고인: 도예종 등 8명 (지식인, 교사, 활동가 등).
  • 집행 시점: 1975년 4월 9일 오전 (대법원 사형 확정 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
  • 주요 혐의: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 등 (이후 재심에서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밝혀짐).

2. 주요 분석 포인트

① 경악스러운 집행 속도와 절차의 파괴

기사 서두의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9일 사형이 집행됐다"는 문장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속도를 보여줍니다. 통상 사형 집행은 가족과의 마지막 면회나 재심 청구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일정 기간 유예됩니다. 하지만 유신 정권은 확정 판결 다음 날 새벽부터 전격적으로 집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피고인들이 진실을 말할 기회를 영구히 박탈하려 했던 정권의 조급함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② 은폐와 통제 속의 집행

오전 9시 30분경 갑작스러운 면회 중단 공고와 삼엄한 경찰 경계는 유가족들조차 모르게 형을 집행하려 했던 정황을 보여줍니다. 유가족들은 대법원 판결 후 면회를 위해 구치소를 찾았다가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③ 왜곡된 유언 보도

기사에서 "도예종은 조국이 공산주의 아래 통일되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는 대목은 당시 중앙정보부나 군 수사기관이 발표한 내용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 적은 것입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을 뿐이며, 죽음 앞에서도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기사 속 유언은 이들을 '간첩'으로 낙인찍기 위한 프레임 씌우기의 일환이었습니다.

④ 비상군법회의라는 특수한 구조

이 사건은 일반 법원이 아닌 비상군법회의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유신 헌법 아래 선포된 긴급조치에 따라 민간인임에도 군사재판을 받아야 했고, 이는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폐쇄적인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3. 시대적 맥락: 유신 정권의 위기 타개책

1974~75년은 유신 독재에 대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지하 조직'이 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들이었습니다.


사건 피해자 8인 및 재심 결과 (2007~2008)

성명 당시 신분 1975년 판결 2007년 재심 결과
도예종 삼화건설 회장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서도원 무직 (언론인 출신)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하재완 무직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이수병 일어 학원강사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김용원 경기여고 교사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우홍선 회사 상무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송상진 양봉업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여정남 무직 (학생운동가) 사형 (집행) 무죄 (명예회복)

4. 시사점: 기록의 이면을 읽는 법

이 기사는 당시 언론이 권력의 통제 하에 사실을 어떻게 왜곡 보도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날의 긴박했던 '사법 살인'의 현장을 증명하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32년 만에 이뤄진 '전원 무죄' 판결은 국가 권력이 법의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