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관심사/역사

사기 - 조선열전(1)

by Lucidity1986 2022. 3. 13.
728x90

1. 아무도 의심하여 믿지 못하다.

조선의 왕 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는 전성시대에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는 한편, 국경 지대인 요동 지방에 요새를 쌓게 했다. 훗날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선은 곧 요동군 밖에 있는 국가로 되었다.

한(漢)나라때 조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방어가 곤란하여 요동의 요새를 다시 쌓고 패수(浿水 : 중국 주장은 압록강, 우리나라 주장은 송화강)를 경계로 하여 그 땅을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그 뒤 연나라 왕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匈奴)로 도망갔을 때 위만도 망명했다. 그는 천여 명을 이끌고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 요새 밖으로 탈출하였다. 그들은 패수를 건너 원래 진나라의 공지(空地)였던 상하장(上下鄣)이라는 곳에 살았다. 그들은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로부터 도망나온 사람들을 복속시키면서 스스로 왕을 청했으며 왕검(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효혜제(劉盈)때 천하가 평정을 되찾자, 요동군 태수는 위만을 한나라의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정하여 이로써 새외(塞外)의 만이를 막고 그들이 국경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들 만이들의 왕이나 우두머리가 한나라 국경에 들어와 황제 알현을 희망하면 금지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 보고서는 황제에게 보고되어 승인을 받았다. 이때 위만은 그의 무력과 재력, 그리고 물자를 이용하여 진번, 임둔군 등 주변의 작을 부족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라가 수천 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한나라로부터 도망나온 사람들을 더욱 많이 유혹하여 모았다. 조선의 왕은 한 번도 한나라에 입조한 적이 없었다. 진번 및 주위의 다른 많은 국가들이 글을 올려 황제에 알현하려 했지만 모두 중간에서 막혔다. 그러자 무제(劉徹) 2년, 한나라는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를 설득했으나 우거는 한나라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한 섭하는 패수에 이르러 마차를 모는 마부를 시켜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 조선의 작위), 장(長)을 죽여 버렸다. 그러고는 경성(長安)에 돌아와서 황제에게 “조선의 장군 한 명을 처치하였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황제는 그를 칭찬하고는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기습 공격을 하여 끝내 섭하를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조칙을 내려 전국의 죄수들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 해 가을, 전에 남월(南越)을 정복했던 누선장군(樓船將軍 : 수군 대장) 양복(楊僕)에게 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 지방에서 발해를 통하여 공격하게 했고, 또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으로부터 출정하게 하여 일제히 우거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우거는 군사를 파견하여 요새 지역을 차지하면서 저항하였다. 좌장군의 부장인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오히려 대패하여 돌아와 군법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편 누선장군 양복은 제나라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왕검성을 공격했다. 우거왕은 성에서 방어를 하였는데, 양복의 군사가 매우 적은 것을 알고 곧 성문을 열고 나와 누선장군을 공격하였다. 누선장군의 군대는 대패하여 지리멸렬 도망치기에 바빴다. 누선장군은 병사들을 잃고 산 속에 숨어 10여 일을 지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다시 모이게 되었다.

좌장군 순체는 패수 서쪽의 조선 군대를 공격했지만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위산(衛山)을 파견하여 군사적 위세를 이용하여 우거왕을 회유하였다. 우거왕은 한나라 사자를 보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나는 항복하려 했소. 다만 두 장군에게 속임을 당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웠고. 지금 사자의 부절을 보니 바라옵건대 항복을 받아주시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 사과하도록 하고 5천 필의 말과 군량을 바치기로 하였다. 그는 모두 1만여 군사를 파견하였는데 모두 무기를 들고 태자를 전송하였다. 그들이 막 패수를 넘으려 할 때 한나라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기왕 항복을 했는데 수행하는 사람에게 무기를 휴대하지 말도록 명령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태자 역시 한나라가 자기를 속여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수를 건너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되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위산을 처형시켜 버렸다. 그리고 재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좌장군은 패수에서 적을 격퇴하여 전진하였다. 그리고 왕검성 아래 도착하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 역시 도착하여 합류한 후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왕은 성을 굳게 지켜 몇 달이 지나도록 공략하지 못하였다.

'기타 관심사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임금의 역대 묘호(태조~인종)  (0) 2022.07.06
사기 - 조선열전(2)  (0) 2022.03.13
무작위 연도(500~경술국치)  (0) 2019.03.25
무작위 연도(기원전~500년)  (0) 2019.03.18
김종필 사망..  (0) 2018.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