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25년
진(秦) 37대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 22년(~210)
위(衞) 49대 각(角) 5년(~209)
진의 왕분(王賁)이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3개월만에 수공(水攻)으로 함락시키고, 국왕을 사로잡아 군현을 설치하다. 이로서, 위나라 멸망하다.
위나라의 멸망으로 삼진(三晋)을 모두 평정했다.
진의 몽염(蒙恬)과 이신(李信)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평여(平與)와 침(寢)을 각각 공격하여 초군을 격파했으나, 성보(城父)에서 초(楚)의 항연(項燕)이 반격하여 이신의 군대를 크게 무찔러 진나라 도위(都尉) 7명을 죽이다.
기원전 224년
결국 진왕이 왕전(王翦)을 다시 기용하여 60만 대군을 동원해 평여와 진(陳)을 함락시키고, 기(蘄)에서 초군을 대파하여 항연을 죽였으며, 수춘성으로 쇄도해 들어가다.
기원전 223년
진군이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아 초나라가 멸망하다.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다. 한니발 바르키가 이끄는 카르타고 군이 티키누스 전투와 트레비아 전투에서 각각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하다.
기원전 216년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을 포위 섬멸(殲滅)하다.
기원전 214년
진의 장수 몽염(蒙恬)이 흉노(匈奴)를 토벌하다.
진군이 남진하여 현재의 광저우에 남해군 번우현(番禺县)을 설치하다.
시황제가 사령관 임효(任囂)와 조타(趙佗)에게 20만의 군사를 주어 남월을 치게 하다.
기원전 212년
시황제가 함양(咸阳)에 있는 400여 명의 유생(儒生)들을 생매장하다.(焚書坑儒)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약 2년 간의 공격 끝에 시라쿠사를 점령하다. 이 와중에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역시 살해당하다.
기원전 210년
중국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가 붕어(崩御)하다. 그 사후 영호해(嬴胡亥), 조고(趙高), 이사(李斯)가 공모하여 유조를 위조, 태자 영부소(嬴扶蘇)와 장군 몽염(蒙恬)에게 자결을 명하여, 그 둘이 결국 자결하고 몽씨 일족이 몰살당하다.
기원전 209년
진(秦) 38대 이세황제(二世皇帝) 영호해(嬴胡亥) 원년(~207)
진의 이세황제가 야왕현에 나라를 유지하던 위군 각(衛君 角)을 폐위시켜 위(衛)나라가 멸망하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발발하다.
기원전 208년
진장 장한(章邯)이 진승, 오광의 난을 진압하다.
기원전 207년
진나라의 간신 조고(趙高)가 이세황제를 시해(弑害)하다.
고조선(古朝鮮)이 요동 지방을 탈환하다.
기원전 205년
전한(前漢) 초대 태조(太祖) 고제(高帝) 유방(劉邦) 2년(~195)
초(楚) 초대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 2년(~202)
한군 쪽에 붙은 제후연합군 56만 명이 팽성 전투에서 항우의 3만 기병에게 대패하고 유방은 형양으로 도주하다.
그 와중에 아버지(劉太公)와 부인 여치(呂后)가 초군에 포로로 잡히다.
유방의 막료로 모략가인 진평(陳平)이 가담하는 한편, 한신(韓信)을 별동대로 파견하여 위(魏)와 조(趙)를 공격하게 하여 항우를 배후에서 견제하려고 했으며, 도적 출신의 팽월(彭越)을 시켜 초군의 배후를 덮치게 하다.
기원전 204년
진평(陳平)이 항우군에 이간계를 써서 항우와 그 책사인 범증(范增)과 종리매(鍾離昧) 사이를 갈라놓는 데 성공히다. 범증은 군을 떠나 귀향하는 도중에 화병으로 등창이 생겨 죽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급박하여 장군 기신(紀信)을 유방(劉邦)으로 가장해 항우에 항복시키고 그 틈을 노려 유방 자신은 서부로 도주하고 형양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가 잠시 지켰지만 이마저 항우에게 격파되어 함락되다. 이 틈을 타 한신(韓信)이 제를 쳐 함락하고 초군 20만여 명과 용저(龍且)도 쳐부수다. 이 과정에서 분노한 제왕 전광(田廣)이 역이기(酈食其)를 기름에 튀겨 죽이다.
기원전 203년
한군과 초군이 몇 달간 광무대치를 벌이다가 8월에 화의를 성사하고 병립(竝立)을 선언하다.
그러나 유방은 되돌아가는 초군을 습격하고 한신(韓信), 팽월(彭越)에게도 참가를 요청하나 은상을 약속받지 못하자 불응하다. 장량(張良)이 이를 지적하자 유방은 과감히 큰 봉토를 은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에 팽월, 한신이 합류하니 초군은 불리한 지경에 처하다.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 - 다른 제후들도 한군에 합류하여 결국 해하(垓下)까지 항우(項羽)를 밀어붙이고, 초군은 완전히 붕괴하여 항우가 소수 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나 강동으로 달아나는 대신 오강(烏江) 기슭에서 자결하다.
유방이 노(魯)의 최종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천하를 일통(一統)하다. 그 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등극하여 통일국가로서의 전한 왕조가 공식 출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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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0년
전한(前漢) 8대 소제(昭帝) 유불릉(劉弗陵) 7년(~74)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로마 함대를 격퇴하고 바이티스 강에서 루키우스 푸피디우스를 격퇴하면서 이베리아를 장악하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시아 속주 총독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군복무를 시작하다.
기원전 79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스스로 독재관을 사임하고 로마 정계에서 은퇴하다.
전직 법무관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아나스 강 전투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게 전사하다.
기원전 78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메텔루스 피우스를 격퇴하다.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다.
기원전 75년
원고구려족 등 토착민의 공격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압록강 유역에서 밀어내, 치소를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옮기다.
기원전 74년
전한 8대 황제 소제가 죽은 뒤 소제의 대신인 곽광은 창읍애왕의 아들 유하(廢帝)를 황제로 추대하다. 하지만 유하는 방탕하여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였고 이에 곽광은 전연년, 장안세 등과 공모하여 유하를 곧바로 폐위시키다. 그리고 무제의 태자였던 유거의 손자 유병이(宣帝)를 궁으로 불러들여 새 황제로 삼다.
기원전 73년
전한(前漢) 10대 선제(宣帝) 유순(劉詢) 2년(~49)
로마에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70여명의 동료와 함께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하다. 베수비우스 산에서 법무관 글라베르를 격퇴한 스파르타쿠스는 노예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군대를 조직한 뒤 반란을 일으키다. 이들은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로마의 몇몇 도시를 공격하다.
테네도스 근처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폰토스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다.
기원전 71년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진압당하다.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가담한 6천여명의 노예들은 이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다.
로마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가 해적과 연합한 크레타인들에게 패하다.
기원전 69년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즉위 기록을 역산하면 이 해에 신라(斯盧國)의 초대 거서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다.
기원전 66년
동명성왕(東明聖王)의 부인이자 온조왕(溫祚王)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 탄생하다.
기원전 60년
흉노(匈奴)의 일축왕(日逐王)이 전한에 투항하다.
전한의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가 창설되다.
기원전 58년
고구려의 초대 태왕(太王)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탄생하다.
기원전 57년
4월에 13세의 박혁거세가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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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년
후한(後漢) 14대 헌제(獻帝) 유협(劉協) 9년(~220)
신라(新羅) 10대 내해 이사금(奈解 泥師今) 석내해(昔奈解) 2년(~230)
고구려(高句麗) 10대 산상왕(山上王) 고연우(高延優) 원년(~227)
백제(百濟) 5대 초고왕(肖古王) 부여초고(扶餘肖古) 32년(~214)
1월에 내해 이사금이 시조묘를 배알(拜謁)하다.
유요가 향년 42세에 병사하고 손책(孫策)이 강동을 평정하다.
완 전투에서 장수가 조조(曹操)를 격퇴하다. 이 과정에서 전위(典韋)와 조앙(曹昻)이 조조를 지키고 사망하다.
원술이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중(仲)을 건국하다.
서주 대전역에서 여포가 원술에게 승리하였으며, 손책이 또한 원술과 결별하고 자립하다. 수춘 전투에서 조조가 원술에게 승리하다.
198년
4월에 신라 시조묘 앞의 넘어진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나다. 5월에 서쪽에 큰 물이 들어 물난리를 만난 주현(州縣)에 1년간 조세(租稅)와 징발(徵發)을 면해 주다. 7월 관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위문(慰問)하다.
양 전투에서 장수가 조조(曹操)에게 승리하다.
소패 전투에서 여포 휘하의 고순이 조조 휘하의 하후돈(夏侯惇)에게 승리하다.
환 전투에서 손책(孫策)이 유훈에게 승리하다.
199년
7월에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다.
서주 공방전 하비 전투에서 조조(曹操)가 여포(呂布)에게 승리하여, 장료는 투항하고 여포, 진궁, 고순은 참수(斬首)되다.
역경 전투에서 원소(袁紹)가 공손찬에게 승리하여, 공손찬이 식솔(食率)을 스스로 베고 자결하다.
헌제가 동승(董承)에게 조조 주살의 밀서를 주다.
유비(劉備)가 허도를 탈출하여 서주에서 자립하고 원소와 동맹을 맺다.
손책(孫策)이 주유와 더불어 노강의 환성을 함락시키고 각각 대교(大橋), 소교(小嬌)를 아내로 삼다.
서주 전투에서 유비가 원술(袁術)에게 승리하여 원술이 원소에게 의탁하러 가는 도중 병사하다.
여강 전투에서 손책이 유훈에게 승리하여, 유훈이 조조에게 투항하다.
202년
촉한의 무장 강유(姜維)가 탄생하다.
원소(袁紹)가 병사하다.
여양 전투에서 조조와 원상, 원담이 싸웠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박망 전투에서 유비가 조조 휘하의 하후돈(夏侯惇)에게 승리하다.
203년
여양 전투에서 조조가 원상, 원담에게 승리하다.
위군 전투에서 원상이 조조에게 승리하다.
원상, 원담간에 내분이 일어나 원담이 조조에게 투항하다.
강하 전투에서 유표(劉表) 휘하의 황조(黃祖)와 손권(孫權)이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시상 전투에서 손권 휘하의 서성(徐盛)이 유표 휘하의 황역에게 승리하다.
204년
삼국시대의 군벌 공손강(公孫康)에 의해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다.
업 전투에서 조조가 원상(袁尙)에게 승리하고 기주(冀州)를 평정하다.
조비(曹丕)가 원희의 아내인 문소황후(文昭皇后)를 아내로 맞이하다.
206년
호관 전투에서 조조가 고간(高幹)에게 승리하여 병주(幷州)를 평정하다.
동해 전투에서 우금이 창희에게 승리하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제갈량(諸葛亮)을 등용하다.(연의에서는 207년)
오의 장군 태사자(太史慈)가 남쪽의 반란을 토벌하러 갔다가 풍토병에 사망하다.
207년
1월에 신라에서 왕자 이음(利音 또는 奈音)에게 벼슬을 내려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를 겸하게 하다.
촉한 2대 황제 후주(後主) 유선(劉禪) 탄생하다.
강하 전투에서 유표(劉表) 휘하의 황조와 손권이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유성 전투에서 조조가 원씨가문을 지원한 오환(烏丸)의 답돈(蹋頓)에게 승리하다.
이후 공손강(公孫康)이 원상, 원희를 참수하여 그 목을 조조에게 보냄으로써 원씨 가문은 멸족되다.
제갈량(諸葛亮)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하다.
조조가 남정(南征)을 시작하다.
신야 전투에서 유비가 조조 휘하의 조인(曹仁)에게 승리하다.
208년
2월에 내해 이사금이 군읍(郡邑)을 순행(巡行)하고 열흘만에 돌아오다. 4월에 왜인(倭人)이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니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이 군대를 끌고 이를 막다.
유표(劉表)가 병사하고 그 뒤를 이은 유종(劉琮)이 조조에 항복함으로써 형주(荆州)가 조조에게 넘어가다.
당양 전투에서 조조가 유비에게 승리하여, 유비가 하구로 달아나다. 장비(張飛)가 장판파에서 길을 막았으며, 또한 조운(趙雲)이 유비의 아들(劉禪)을 구하다.
조조가 강릉을 점령하고 형주의 내정을 재편하다. 또한 가후(賈詡)가 장기전을 제안했으나 조조가 듣지 않다.
제갈량(諸葛亮)의 유세로 인해 손권(孫權)과 유비의 연합이 결성되다.
적벽 전투에서 손권, 유비 연합군이 조조에게 대승하여 조조의 세력이 약화되다.
210년
신라에서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관리를 보내어 군읍의 감옥에 있는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사면(赦免)하다.
오의 주유(周瑜)가 서천을 정벌하러 떠나는 도중 병사하다.
방통(龐統)이 유비에게 출사(出仕)하다.
조조가 업에 동작대(銅雀臺)를 건설하다.
211년
1월에 신라에서 훤견(萱堅)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一吉湌)으로 삼다.
조조가 한중(漢中)의 장로(張魯) 토벌을 시도하나, 이를 양주(凉州) 침공으로 착각한 관중 군벌들이 반발하여 마초(馬超), 한수(韓遂)의 거병으로 이어지다.
유비가 촉에 들어가다.
손권이 본거지를 오(吳)에서 말릉(秣陵)으로 옮기고 건업(建業)으로 개명하다.
212년
3월에 가야(伽倻)에서 신라에 왕자를 보내 인질로 삼다. 5월에 큰비가 민가에 피해를 입히다.
동관 전투와 위수 전투에서 조조가 마초, 한수에게 승리하다. 가후(賈詡)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틀어져, 조조가 옹주(雍州)를 평정하다.
조조의 참모 순욱(荀彧) 사망하다.
유비와 유장(劉璋)이 반목하여 백수 전투에서 유비가 유장 휘하의 양회, 고패에게 승리하다.
유비가 곽준(霍峻)에게 가맹관을 맡기고, 유장 휘하의 유괴(劉璝)에게 승리하여 부성을 취하다. 면죽관 전투에서는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213년
조조가 위공(魏公)에 등극하다.
유수구(濡須口) 전투에서 조조와 손권이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유비가 유장 휘하의 이엄(李嚴)에게 승리함으로써 면죽관을 취하고, 유순(劉循)에게 승리함으로써 낙성을 취하다. 한편 가맹관 전투에서는 곽준(霍峻)이 유장 휘하의 상존에게 승리하고 주살(誅殺)하다.
마초(馬超)가 다시 거병하여 기성을 함락시키다. 이에 허도에 있던 마씨 일가가 연좌제로 처형되다.
214년
백제(百濟) 6대 구수왕(仇首王) 부여구수(扶餘仇首) 원년(~234)
3월에 신라에서 큰 바람이 나무를 꺾다. 7월에 백제가 신라 서쪽의 요차성(腰車城)을 쳐 성주 설부(薛夫)를 죽이다. 이에 내해 이사금이 이음(利音)에게 명해 6천명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파괴하다.
기 전투에서 조조 휘하의 하후연(夏侯淵)이 마초에게 승리하여 마초가 장로(張魯)에게 투항하다.
흥수 전투에서 하후연이 한수에게 승리하다.
낙(연의의 낙봉파) 전투에서 유비가 유순에게 승리하다. 이 때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하다.
환 전투에서 손권이 주광(朱光)에게 승리하다.
유비가 성도(成都)를 함락하고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익주 전역을 장악하다.
자칭 왕이라 일컫던 평한왕 송건(宋建)을 하후연이 진압해서 모두 참하다.
215년
조조가 강, 저의 정벌을 시작하여, 무도 전투에서 조조 휘하의 장합(張合)이 저족의 두무에게 승리하다. 조조가 하지 전투에서 다시 저족의 군대에게 승리하다. 한수(韓遂)가 서량의 장수인 국연(麴演)과 장석(蔣石)에게 살해되다.
양평관 전투에서 조조가 장로군에게 승리하다. 장로는 파서(巴西)로 후퇴하다.
유비와 손권이 형주를 가지고 다투기 시작하여, 손권이 형주 남부의 3군에 태수를 파견하나 관우(關羽)가 이를 쫓아내다. 이에 손권이 육구에 주둔하고, 노숙(魯肅)릏 파구에 주둔시킨 다음 여몽(呂蒙)이 공격하여 장사, 계양, 영릉을 탈취하다.
관우가 3군을 다시 탈취하기 위해 익양에 주둔하다.
이 때 조조가 한중을 쳐 장로가 파서로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가 강하, 장사, 계양 3군을 영구히 손권에게 양도하고, 손권은 영릉을 유비에게 반환하여 영토분쟁을 끝내고 화친하다.
한중 전투에서 조조가 장로에게 승리하여 장로가 결국 투항하고 방덕(龐德)이 조조 휘하로 들어가다.
2차 합비 공방전에서 장료(張遼)가 손권의 대군을 막아내다.
217년
2차 유수구(濡須口) 전투에서도 조조와 손권이 승패를 가리지 못하여, 강화를 맺다.
가후(賈詡)의 헌책을 받아들인 조조가 당시의 장남 조비(曹丕)를 태자로 임명하다.
노숙(魯肅)과 능통(凌統)이 사망하다.
218년
7월에 신라의 무기고에서 병사의 장비가 스스로 나오다. 백제군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내해 이사금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쳐서 내쫓다.
허(許)에 화재가 발생하다. 경기(耿紀), 위황(韋晃), 김의(金禕), 길본(吉本) 등이 모의하여 조조를 살해하려 했으나 왕필(王弼)등의 방어로 실패하고, 이들의 삼족이 모두 죽다.
무도 전투에서 조홍(曹洪)이 유비군의 오란(吳蘭)에게 승리하다.
양평관 전투에서 하후연(夏侯淵)과 유비가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오환(烏丸)의 후음(侯音)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키자, 조조의 차남 조창(曹彰)이 진압하다.
219년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가 최종 승리하고, 유비가 마침내 한중왕(漢中王)에 등극하다.
이 과정에서 조조군의 하후연(夏侯淵)이 전사하다.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關羽)가 우금(于禁)이 이끄는 7군을 수몰시키다. 우금은 투항하고 방덕(龐德)은 끝내 투항하지 않아 참수되다.
허도(許都) 근처에 관우에게 호응하는 세력들이 조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조조가 천도(遷都)를 하고자 하나 사마의(司馬懿)등이 말려 그만두다.
조인(曹仁)이 포위상황에서 항복을 고려했으나 만총(滿寵)의 설득에 의해 수성을 계속하다. 이내 서황(徐晃)의 지원군이 관우군을 패퇴시키다.
그 사이 여몽(呂蒙)의 계략에 의해 미방(未方)과 부사인(傅士仁)이 오에 항복하고 형주성이 함락되다.
맥성 전투에서 여몽이 관우군에게 승리하여 관우가 손권(孫權)에 의해 참수(斬首)되고, 그 목이 조조에게 보내지다.
220년
위(魏) 초대 고조(高祖) 문제(文帝) 조비(曹丕) 원년(~226)
3월에 신라의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이 사망하다. 충훤(忠萱)을 이벌찬으로 삼고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하게 하다. 7월에 양산(楊山)서쪽에서 크게 사열하다.
2월에 조조(曹操)가 사망하고 조비(曹丕)가 그 뒤를 이어 승상 및 위왕(魏王)의 자리를 계승하다.
만총(滿寵)이 손권의 신야 공격을 막아내다.
유비군의 맹달(孟達)과 신탐(申耽)이 조비에게 투항함으로써 상용의 3군 6현이 넘어가다. 또한 유봉(劉封)이 숙청당하다.
10월에 헌제(獻帝)가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써 후한(後漢)이 완전히 멸망하고, 낙양을 수도로 삼았으며 위(曹魏)를 건국하다. 황초(黃初)로 개원했으나 손권과 유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한의 건안(建安)연호를 계속 사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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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년
위(魏) 3대 소제(少帝) 조방(曹芳) 원년(~254)
촉(蜀) 2대 후주(後主) 유선(劉禪) 18년(~263)
오(吳) 초대 대제(大帝) 손권(孫權) 19년(~252)
신라(新羅) 11대 조분 이사금(助賁 泥師今) 석조분(昔助賁) 11년(~247)
고구려(高句麗) 11대 동천왕(東川王) 고우위거(高憂位居) 14년(~248)
백제(百濟) 8대 고이왕(古爾王) 부여고이(扶餘古尒) 7년(~286)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다.
조방이 뒤늦게 개원하고, 조상(曹爽)과 사마의(司馬懿)가 후사를 맡다.
청주자사 왕릉이 정동장군(征東將軍) 가절을 받고 도독양주제군사에 봉해지다.
한가군(漢嘉郡)의 만족(蠻族)을 정벌하다가 상총이 전사하다.
남만(南蠻)의 반역을 장억(張嶷)이 토벌하다.
241년
오의 태자 손등이 향년 32세로 사망함에 따라 손권의 셋째 아들 손화가 태자가 되다.
오가 세 방향으로 위를 공격하다. 주연군은 번성을 공격하여 아들 주이와 여거 등이 외성 공략에 성공하나 위의 호질과 사마의(司馬懿)가 이들을 격퇴하다. 장휴, 고승이 수춘을 공격하나 위군의 진격만 저지하다. 전종이 회남의 제방 작피를 공격하나 위의 왕릉, 손례와 대치하다 서로 물러나다.
제갈근이 향년 67세로 사망하여 셋째 제갈융이 직위를 계승하다.
242년
신라에서 가을에 대풍년(大豊年)이 들고, 고타군(古陁郡)이 가화(嘉禾)를 진상하다.
고구려의 동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나 실패하다.
오의 중서령 감택이 태사대부를 겸하여 태자 손화와 노왕(魯王) 손패(孫覇)를 가르치다.
245년
육손(陸遜)이 후계 갈등에 대한 손권의 질책으로 분사(憤死)하여 육항이 스무살의 나이로 뒤를 잇다.
마무의 손권 암살이 실패하다.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입하자 동천왕이 북옥저(北沃沮)로 파천(播遷)하다.
246년
10월에 신라 동남쪽에 흰 기운이 있었는데 마치 한 필의 명주와도 같았다고 전해지다. 11월에 경도(京都)에서 지진이 나다.
촉의 장완(蔣琬)이 사망하고 비의와 강유(姜維)가 녹상서사 등을 승계하다. 비의의 상서령의 자리는 동윤(董允)에게 넘어가다.
오의 승상에 보즐(步騭)이 임명되다.
동윤이 과로로 사망하고, 시중은 진지가 승계하다.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의 밀우(密友), 유유(紐由)의 활약으로 후퇴하다. 이때 흩어진 관구검의 우군 말갈(靺鞨)은 옥저(沃沮)에 남다.
247년
신라(新羅) 12대 첨해 이사금(沾解 泥師今) 석첨해(昔沾解) 원년(~261)
7월에 첨해 이사금이 시조묘(始祖廟)를 뵙고 아버지 골정(昔骨正)을 세신 갈문왕(世神 葛文王)에 봉하다.
오의 승상 보즐이 사망하고 아들 보협과 보천이 계승하다.
위의 곽회(郭淮)가 강족과 흉노(匈奴)의 침공을 격퇴하다.
조상(曹爽)이 전권을 장악하여 사마의(司馬懿)가 일시적으로 은퇴하다.
강유(姜維)가 위장군으로 승진하여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가 되다.
249년
고구려(高句麗) 12대 중천왕(中川王) 고연불(高然弗) 2년(~270)
4월에 왜인(倭人)이 신라의 서불한(舒弗邯=伊伐湌) 석우로(昔于老)를 죽이다. 7월에 궁 남쪽에 남당(南堂)을 짓고, 양부(良夫)를 이찬(伊湌)으로 삼다.
사마의(司馬懿)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曹爽)과 그 일가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다.
촉의 위장군 강유의 첫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다. 국산에 축성하고 구안(苟安), 이흠으로 하여금 수성케 하였으나 곽회(郭淮)및 진태의 명을 받은 등애(鄧艾)가 수로를 차단하여 촉군이 항복하다. 이에 강유는 요화(廖化)를 보내 등애를 치게 했으나 등애가 먼저 성에 들어가 조성을 공격한 강유의 군대를 물리치다. 이 공으로 등애가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지다.
오의 좌대사마(左大司馬) 주연(朱恭)이 사망하고 양자 주적이 계승하다.
촉장 마충이 성도에서 병사하다.
250년
강유(姜維)가 위의 서평(西平)을 공격하여 중랑장 곽순(郭循)이 투항하자 그를 좌장군에 임명하다.
오의 후계 갈등으로 노왕 손패가 자결을 명받고 태자인 손화는 그 자리를 잃고 남양왕이 돼서 장사로 귀양가다. 그 후에 손량(孫亮)이 태자가 되다.
위의 문흠(文欽)이 오에 거짓 투항하나 주이(朱異)가 이를 간파하여 격퇴시키다.
위의 정남장군(征南將軍) 왕창(王昶)이 오를 공격하여 주적(주연(朱恭)의 양자)을 패배시키나 강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가다.
251년
1월에 신라가 남당(南堂)에서 청정(聽政)을 시작하다. 한기부(漢祇部) 사람 부도(夫道)를 불러 아찬(阿飡)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로서 사무를 맡기다.
위의 왕릉(王凌-王允의 조카)의 역모가 발각되다. 왕릉은 낙양으로 가던 도중 음독자살(飮毒自殺)했으나 공모자인 영호우(令狐愚)와 함께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위의 조정에서는 두 집안 모두 삼족을 멸하다.
사마의가 사망하고 사마사(司馬師)가 계승하여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다.
손권이 태원(太元)으로 개원하다.
253년
오(吳) 2대 폐제(廢帝) 손량(孫亮) 2년(~258)
4월에 용(龍)이 신라 궁궐 동쪽 못(淵)에 나타나다. 금성 남쪽의 넘어진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나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시조묘(始祖廟)와 명산(名山)에 빌고 제사지내니 비로소 내리다. 굶주린 해여서 도적이 많았다.
9월에 금관가야(金官伽倻)에서 마품왕이 즉위하다.
촉에서 신년 연회 중에 비의(費禕)가 곽순(郭循)에게 암살되다. 강유(姜維)가 석영을 나와 남안을 포위했으나, 위의 옹주자사 진태(陳泰)가 이르자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제갈각(諸葛恪)이 승전에 교만하여 20만 대군으로 위의 신성을 공략하나 관구검(毌丘儉)과 장특(張特)에 막혀 실패로 돌아가다. 패전 이후로도 여전히 서주 및 청주로의 진군을 꾀하자 손준(孫峻)등이 황제 손량과 모의하여 제갈각 암살을 계획하여 연회 중에 제갈각이 살해당했으며, 또한 그의 삼족을 멸하다.
손준에 의해 폐태자 손화(孫和)가 사사되다.
254년
위(魏) 4대 폐제(廢帝)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 원년(~260)
강유가 3차 북벌을 단행하다. 농서(隴西)로 진군하여 적도현 이간(李簡)의 항복을 받고 양무(襄武)를 포위하여 정촉호군(征蜀護軍)을 궤멸시키고 대장 서질(徐質)을 참하다.
촉의 노장 장억(張嶷)이 서질에게 전사하다.
서강왕 미당(迷當)이 때를 맞추어 남안으로 출진했으나 진태가 거짓 항복 후 곽회(郭淮)와 협공하여 강족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기세를 몰아 철롱산의 포위를 풀다.
10월에 위 황제 조방이 사마사(司馬師)에 의해 폐위 후 제왕(齊王)으로 강등되고, 명제(曹叡)의 조카인 조모가 13살의 나이로 즉위하다.
255년
9월에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일벌찬(一伐湌) 익종(翊宗)이 귀곡(槐谷) 서쪽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사하다.
10월에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사마사의 전횡에 분개한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연주자사 등애(鄧艾)를 공격한 문흠이 패배하다.
거기장군 곽회(郭淮)가 사망하다.
사마사의 눈밑 혹이 악화되어 진중에서 병사하고, 오의 손준(孫峻)이 문흠의 응원군으로 가세하다. 문흠과 문앙이 오로 귀순하다.
관구검은 농성 도중 달아나다 활에 맞아 사망하고, 반란군이 와해되다. 아들 관구전 등 삼족이 멸해지다. 이 때를 틈탄 손준의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다.
강유가 대장군(大將軍)에 봉해지고, 4차 북벌을 단행하여 하후패(夏侯覇), 장익(張翼)과 함께 조수에서 왕경(王經)을 크게 깨부수고 적도(狄道)를 포위하나 진태 및 등애의 구원군에 의해 후퇴하다.
256년
3월에 신라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는데, 길이가 세 길이고, 높이가 한 길 두 자였다. 10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강유가 5차 북벌을 단행하여 단곡(段谷)을 치나 적도(狄道), 농서(隴西), 남안(南安), 기산(祁山)을 미리 방비해둔 등애의 승리로 끝나다. 단곡전투에서 등애가 강유에게 크게 승리하였으며, 한중(漢中)의 도독이었던 호제(湖濟)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강유가 20명의 부장을 잃다.
강유는 패전 후 스스로의 지위를 후장군으로 강등시켰으며, 이 전투에서 하후패(夏侯覇)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다.
257년
강유가 6차 북벌을 단행하여 낙곡(駱谷)을 거쳐 장성을 공격하나 등애(鄧艾)가 응하지 않자 후퇴하다. 또한 다시 대장군직에 오르다.
제갈탄(諸葛誕)이 수춘(壽春)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이에 오의 손침(孫綝)이 문흠(文欽), 전단(全端), 전역(全懌), 당자(唐咨) 등의 지원군을 보내나 수춘 전투에서 위의 왕기(王基)가 전단에게 승리하다.
사마소(司馬昭)가 종회(鍾會)와 함께 수춘으로 진군하다. 시상(柴桑)의 육항(陸抗)이 위군을 격파하다.
258년
오(吳) 3대 경제(景帝) 손휴(孫休) 원년(~264)
오 황제 손량(孫亮)이 손침(孫綝)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고, 손권의 육남 손휴가 즉위하다.
촉황제 유선이 경요로 개원하다. 촉의 권신 진지 사망하다.
수춘이 결국 함락되고 제갈탄(諸葛誕)이 전사하다. 사마소(司馬昭)가 이 공로로 구석(九錫)을 받고 진국공(晉國公)에 등극하다.
손휴에 의해 손침이 연회 중에 살해되고, 제갈각(諸葛恪), 등윤(滕胤), 여거(呂據)가 사면되다.
260년
위(魏) 5대 원제(元帝) 조환(曹奐) 원년(~265)
고이왕이 백제의 관직을 정비하다. 여름에 큰 비가 와서 신라의 산이 40여 군데 무너지다.
위 황제 조모가 역적 사마소를 주살하려 했으나 시중 왕침(王沈), 산기상시(散騎尙侍) 왕업(王業)이 배신하고 사마소에게 일러바쳐 실패로 돌아가고 조모가 백주대낮에 시해당하다.
조조의 9남 조우(曹宇)의 아들 조환이 황제로 즉위하다.
복양흥(濮陽興)이 오의 승상이 되다.
261년
신라에서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촉 황제 유선이 229년에 사망한 조운(趙雲)의 관직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시호를 순평후(順平侯)로 추증하다.
오의 설후(薛珝)가 손침의 주살을 축하하는 촉의 답례 사신으로 성도에 다녀오다. 그 후에 손휴가 촉의 정치에 대해 묻자 촉의 환관 황호(黃皓)가 망국을 일으키리라 예언하다.(燕雀處堂)
262년
신라(新羅) 13대 미추 이사금(味鄒 泥師今) 김미추(金味鄒) 원년(~284)
3월에 신라에서 용(龍)이 궁궐 동쪽 못(淵)에 나타나다. 7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금성의 서문이 불타고 민가 300여 구(區)를 태우다.
강유가 마지막 북벌을 단행하나 조양 전투에서 위의 등애(鄧艾)에게 패하다.
사마소(司馬昭)가 촉 정벌 계획을 세우다.
263년
1월에 신라에서 이찬(伊湌) 양부(良夫)에게 벼슬을 내려 서불한(伊伐湌, 후기에는 角干)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를 겸하게 하다. 2월에 왕이 친히 국조묘(國祖廟)에 제사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리다. 부친 김구도(金仇道)를 추봉하여 갈문왕(葛文王)으로 삼다.
촉황제 유선(劉禪)이 염흥(炎興)으로 개원하다.
등애, 종회, 제갈서가 이끄는 위군이 촉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다. 오황제 손휴가 촉을 구원하기 위해 정봉(丁奉)을 보내다.
검각 전투에서 강유와 종회가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 그 사이 등애가 무도, 음평 샛길로 진군하여 면죽관 전투에서 제갈첨(諸葛瞻:諸葛亮의 아들)에게 승리하다. 이로 인해 제갈첨과 그 아들 제갈상(諸葛常)이 전사하다.
위군에 성도에 이르자 유선이 투항하여 촉이 멸망하고, 강유도 이 소식을 듣고 투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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