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게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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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다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제장(諸將)들은 모두 새재[鳥嶺]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입(砬)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은 포위를 뚫고 달천(㺚川)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7일

신립을 삼도 순변사에 제수하다.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에 제수하였다. 상(선조)이 친림하여 전송하면서 보검(寶劍)한 자루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이일(李鎰)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中外)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의 군기(軍器)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7일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 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당초에 수길이 매우 빈천하여 꼴[芻]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전(前) 관백(關白)이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

서청에서 환어사 등을 친국하다

왕(광해군)이 〈서청(西廳)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는데,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원임 대신 심희수(沈喜壽), 의금부 당상 박승종(朴承宗)·유공량(柳公亮)·조존세(趙存世)·정엽(鄭曄), 대사헌 송순(宋諄), 대사간 유숙(柳潚), 승지 이덕형(李德泂)·이춘원(李春元)·권진(權縉)·김지남(金止男)·신경락(申景洛), 사관 변삼근(卞三近)·이유달(李惟達)·유여항(柳汝恒)·한옥(韓玉), 가주서 이배원(李培元)이 입시하였다.〉 환어사(喚御史/임해군의 첩)에게 압슬형을 가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예숙(禮叔) 이하 환어사와 연루된 사람이 여덟 명이었는데 모두 국문에 불복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환어사에게 형을 더 가하라." 하니, 환어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청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환어사가 말하겠다는 것은..

만취 사병 극장출구에 수류탄(1968년)

토요일인 18일 밤 10시 25분경 경북 안동시 운흥동 142 문화극장에서 국산영화 "복수"의 마지막 회 구경을 마치고 막 극장문을 나서던 관람객들에게 술에 만취된 전방사단 소속 휴가병이 미제 수류탄(M26) 2발을 약 30초 간격으로 던져 폭발시키는 바람에 국민교 어린이 2명을 포함한 5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9명이 중상, 다른 16명이 경상을 입고 퇴장하던 관람객 1300여명이 혼비백산하여 일대 혼란을 빚은 불상사가 발생했다. 범인 신영식 하사(23ㆍ육군 제 O사단 OO연대 2대대 7중대 향도)는 범행 후 50분만에 현장에서 150m지점에 있는 「향영」여인숙에 잠입해 있는것을 안동경찰서 형사대가 포위검거하여 군 수사기관에 넘겼다. 범인 신하사는 19일 낮 2시경 기자들과 만나고 "단독범행이며 애인..

안동 수류탄 사건 신 하사 사형 집행(1969년)

안동 수류탄 투척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신영식 하사에 대한 사형이 31일 오후 2시 서울 근교에서 총살형으로 집행됐다. 사형 집행 전 신 하사는 실명자에게 안구를 희사할 것임을 희망, 서울 의대 안과 과장 윤원식 박사에 의해 그의 눈은 아이뱅크에 보관되었는데, 1일 윤박사의 집도로 파월장병 박모 일병과 신모 일병의 눈에 이식된다. -조선일보 1969년 8월 1일

살인범 안, 박 두명에게 총살형을 집행(1964년)

14일 하오 3시 육군 법무당국은 상관 살해범 안성근(22ㆍ8769부대 소속)하사와 살인 및 강간미수범 박일용(31ㆍ3225부대 소속)이등병 등 2명을 경기도 부평 형장에서 총살형을 집행했다. 안은 작년 8월 14일 소속부대 상관 김상렬 준위를 사감 끝에 「칼빈」총으로 사살했고, 박은 62년 11월 20일 경북 금릉군 남면 봉천동에 사는 정남출씨의 아내 서심분씨를 강간하려다 미수, 살해했던것인데 이들은 군재 1ㆍ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었었다. -동아일보 1964년 7월 16일

최영오 일병 총살형을 집행(1963년)

사형이 확정되었던 학보병 최영오(26ㆍ서울 문리대 기상학과 4년 당시입대) 일등병은 각계 각층의 잇닿은 구명호소도 보람없이 18일 하오 2시 40분 서울 근교 수색의 모 사단 사격장에서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뒤이어 이 소식을 들은 최군의 어머니 이숙자(60)여사도 이날 밤 "영오야!"하고 죽은 아들의 넋을 부르며 한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두 모자는 한날함께 비극적인 생을 끝냈다. "최군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은 18일 하오 4시 30분경 서울교도소에서 최군의 집(서울 아현동 산10)에 보낸 전보 한통으로 전해졌다. 그 전보의 내용은 "19일 하오 5시 이내로 최군의 시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최군의 형 최영수(29)씨는 이날 상오 11시 교도소에서 정례적으로 영오군을 면회했었으며 집에 돌..

태상왕이 연화방 신궁에서 훙하다

태상왕(태종)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태상왕이 별전에서 승하하시다

태상왕(太上王/태조)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항상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자면서 친히 진선(進膳)의 다소(多少)와 복약(服藥)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마땅함을 보살폈는데, 이날 새벽에 이르러 파루(罷漏)가 되자, 태상왕께서 담(痰)이 성(盛)하여 부축해 일어나 앉아서 소합향원(蘇合香元)을 자시었다. 병(病)이 급하매 임금이 도보(徒步)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태상이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상왕(上王/정종)이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오니, 임금(태종)이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으로 하여금 전(奠)을 주장하게..

태조의 상사를 조문하는 황제의 칙서와 부의

기보와 임관이 칙서(勅書)와 사부(賜賻)를 받들고 왕궁에 이르렀다. 백관 분사(百官分司)가 태평관에 나아가 앞에서 인도하고, 임금(태종)이 상장(喪杖)을 버리고 질(絰)을 벗고 최복(衰服)으로 대문 밖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정비(靜妃)의 곡위(哭位)를 경연청(經筵廳)에 베풀고 시녀(侍女)를 거느리고, 유장(帷帳)을 쳤다. 백관(百官)은 전정(殿庭)에 서립(序立)하였다. 사신이 정전(正殿)에 이르러 남향하여 서매, 임금이 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정전에 올라가 북향해 서서 사배(四拜)하고, 백관도 또한 사배하였다. 예(禮)가 끝나서 사신이 나가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문 밖까지 전송하였는데, 한결같이 의주(儀注)와 같이 하였다. 그 칙서(勅書)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 에게 칙(勅..

효령대군 이보의 졸기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가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보(𥙷)는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이미 관례(冠禮)하고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封)해졌다. 젊어서부터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일찍이 태종을 따라 평강(平康)에서 사냥하면서 다섯 번을 쏘아 다섯 번 다 맞추니, 위사(衛士)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편치않으므로 이보(李𥙷)가 몸소 탕약(湯藥)을 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태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비[臧獲]를 내려 주었다. 세종(世宗)께서 우애(友愛)가 지극히 도타와서 늘 그 집에 거둥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야 파(罷)하곤 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