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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당시 신문기사)/대노

닮아가는 옛 수법 박 대통령이 대노(1966년)

Lucidity1986 2023. 11. 9. 21:37

연발하는 테러사건들이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아 가뜩이나 정부가 의심을 받고 있는판에 경찰이 박한상 의원 테러 범인이라고 발표한 용의자가 경찰측의 조작에 의한것으로 점차 굳어지자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명년 선거에 표를 깎는 짓을 저지르는것 같다고 큰 걱정.

정일권 국무총리는 18일 아침 엄민영 내무부장관, 민복기 법무장관, 이봉성 서울지검장 등을 불러 박 의원 테러사건에 대한 진상 보고를받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대노하여 철저히 조사하여 관계자를 엄벌하도록 지시.

그런데 한 당국자는 「조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테러사건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면서 「경찰의 숫법이 점차 자유당 시대의 모습을 닮아간다」 고 걱정. 그는 「박 대통령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와 같은 과잉충성이기 때문에 사건 전모가 드러나는대로 단호하게 처벌하여 그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시범을 보일것」 이라고 시사.

 

- 조선일보 1966년 6월 19일

 

사족 : 결국 저 테러는 윤필용이 한 거였다고..

 

1. 사건의 성격: '공권력에 의한 테러와 경찰의 허위 조작'

  • 시기: 1966년 6월.
  • 피해자: 박한상 의원 (당시 신민당 소속 야당 의원).
  • 상황: 야당 의원이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했으나, 경찰이 엉뚱한 용의자를 진범으로 몰아 발표했다가 조작임이 드러난 상황.
  • 대통령의 반응: 박정희 대통령의 '대노(大怒)'와 철저한 수사 지시.

2. 주요 분석 포인트

① 경찰의 조작 수법: "자유당 시대의 재현"

기사 속 정부 당국자가 "경찰의 수법이 자유당 시대를 닮아간다"고 탄식한 대목은 매우 뼈아픈 지적입니다. 이승만 정권(자유당) 시절의 정치 테러와 조작 수사가 5·16 이후의 '제3공화국'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내부자조차 인정한 셈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용의자로 만들어 사건을 덮으려 했던 경찰의 행태는 공권력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② "과잉충성"이라는 프레임과 대통령의 분노

당시 정권은 이 사건을 '일부 경찰의 과잉충성'으로 몰아세우려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과잉충성을 제일 싫어한다는 언급을 흘리며, 정권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테러의 배후가 권력의 핵심(윤필용 등 군부 세력)에 있다는 의심을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제로 풀이됩니다.

③ 정치적 위기: "명년 선거 표 깎는 짓"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기에, 정일권 총리와 고위직들이 이 사건을 '표'와 연결해 걱정하는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관계자 엄벌'과 '단호한 처벌'이라는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3. 역사적 진실: 윤필용의 개입

당시 조작된 용의자 뒤에 숨어있던 진짜 배후는 윤필용이었습니다.

  • 박한상 의원은 당시 국회 법사위에서 군 내부의 부조리와 정치 군인들의 실태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인물이었습니다.
  • 이에 앙심을 품은 윤필용 측 세력이 '군기 교육' 혹은 '응징' 차원에서 테러를 저질렀고, 경찰은 이 거대한 배후를 감추기 위해 허위 범인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군부 내 사조직(하나회 등)의 위세가 사법 체계까지 무력화할 정도로 비대해졌음을 암시합니다.

사건의 전개 구조 요약

단계 주요 내용 비고
발단 야당 박한상 의원 테러 발생 괴한들의 습격
전개 경찰, 용의자 검거 발표 무고한 시민 조작
위기 조작 사실 탄로 및 여론 악화 "자유당 식 수법" 비판
절정 박 대통령 대노 및 국무총리 보고 관계자 엄벌 지시 (꼬리 자르기)
진실 배후가 군부 실세 윤필용으로 밝혀짐 정치 군인의 공권력 오남용

4. 시사점: '고소거리'를 넘어선 '비극'

이 사건은 '공권력이 시민을 공격하고 그 흔적을 조작'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른 국가적 비극입니다. 정권이 "오해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걱정한 지점은 이미 그 오해가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 의심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