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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당시 신문기사)/사형 집행

최영오 일병 총살형을 집행(1963년)

by Lucidity1986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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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확정되었던 학보병 최영오(26ㆍ서울 문리대 기상학과 4년 당시입대) 일등병은 각계 각층의 잇닿은 구명호소도 보람없이 18일 하오 2시 40분 서울 근교 수색의 모 사단 사격장에서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뒤이어 이 소식을 들은 최군의 어머니 이숙자(60)여사도 이날 밤 "영오야!"하고 죽은 아들의 넋을 부르며 한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두 모자는 한날함께 비극적인 생을 끝냈다.

"최군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은 18일 하오 4시 30분경 서울교도소에서 최군의 집(서울 아현동 산10)에 보낸 전보 한통으로 전해졌다.

그 전보의 내용은 "19일 하오 5시 이내로 최군의 시체를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최군의 형 최영수(29)씨는 이날 상오 11시 교도소에서 정례적으로 영오군을 면회했었으며 집에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이러한 정보를 받은것이다.

한 집에 사는 집주인 김씨의 말에 의하면 전보를 펴본 순간 영수씨의 얼굴은 무덤덤할 뿐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나 연락을 받은 누이 최영애(37ㆍ아현동 465)씨가 달려오자 두 남매는 맞붙들고 울음을 터트렸다 한다.

이때 최군의 어머니 이씨는 집에 없었으며 이날 밤 7시경 집에 돌아와 영오군의 사형 집행 소식을 눈치채고 비실비실 방안에서 쓰러졌다 한다.

이 여사는 "이제 자리펴고 잘터이나 나가라"고 이웃 사람을 내보낸 후 밤 10시 40분 경 혼자 지팡이를 짚고 털신을 끈채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이때 한방에 있던 최군의 형은 거의 실신상태에 빠져 어머니의 가출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행방불명을 확인한 가족들과 동민들은 두 패로 갈려 한 패는 영천의 교도소와 그 부근의 작은딸 최영숙(32)씨 집으로, 다른 한패는 한강으로 나갔다.
이여사가 평소에도 영오군을 면회하면 "너 고생시킬까보아 강물에 못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 마포전차 종점에 이른 가족들은 원효로로 가는 길로 꺾었다. 그 순간 이 여사의 장녀 영애씨는 "영오야 영오야" 하고 부르짖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강으로 면한 난간의 아래쪽 벼랑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부랴부랴 높이 20여 「미터」의 벼랑을 뛰어내려갈때 또 한번 "영오야" 하는 어머니의 비명을 들었다 한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들은 어머니의 소리였다는 것이다. 강변에 내려선 가족들은 강물에서 불과 1「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꼼꼼한 이여사가 지팡이는 돌로 괴어 꼿꼿이 세워놓고 그 앞에 털신을 나란히 벗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여사는 이렇게 뒤를 아물려 놓은 후 네길가량의 강물에 걸어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소용돌이치는 강물은 조용하기만 할 뿐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이곳은 이여사가 자주 빨래하러 오던 곳이며 "여기서 한번 빠지면 다시 못 살아온다"고 가족들에게 말해오던 장소였다. 그만큼 투신자살 사건이 많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가족들은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어머니의 유품인 지팡이와 털신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19일에는 새벽부터 강변에 나가 배 7척을 동원하여 낚시로 시체를 찾으려는 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가족들은 생각난듯 한번씩 울음을 터뜨렸다.

최군의 누이 영애씨는 최군이 지난 3월 6일 면회간 어머니에게 "힘이 드시더라도 자주 와주세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라고 말한것을 되씹고 있었다.

최군의 어머니 이여사는 지난 13일 마지막으로 영오군을 면회했었다. 이여사는 최군이 작년 10월 19일 육본 고등 군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날 밤 집에 돌아와 음독했다가 다시 살아난 후 더욱 몸이 노쇠한 채 지금까지 버티어왔다 한다.

-각계 반향

◇평론가 백철씨 담 = 최일병 관계로 여러사람이 진정한 모양인데 저도 했었지요. 정말 안타깝군요. 이번일은 상사 자신도 잘못한 점이 있고 그로 인해 일어난 일이니 군에서도 이 방면에 상당한 책임을 느껴야 하고 그럴 줄로 기대했었지요. 법적으로나 또 결과적으로는 마땅한 일이라 하되 인도상으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므로 구제될 희망을 가졌었지요. 아무런 효과 없이 사형 집행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최군의 명복을 빌 따름입니다.

◇소설가 최정희 여사 담 = 아, 아(외마디 소리) 그렇게 되고 말았나요. 떨이는구만요. 숨이 막혀지는 것 같군요. 어쩌면 좋아요. 구명운동 해온게 부끄럽기만 하군요. 이야기도 하기 싫어지는군요.
대법원 기각 판결 후 김종오 참모총장을 만났더니요, 자기 손에서 권한이 넘어간 일이 돼서 어쩔수 없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박 의장을 만나러 최고회의를 들렸더니 이 공보실장(이후락)이 요즘 그분이 외부인을 만나기 싫어하니 일단 면회신청을 내라고 해서 면회신청을 저지난 주 토요일날 제출하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기가 막히는군요. 글쎄 법도 아량을 보일 때가 있어야 하지않겠어요.
불유쾌한 때는 하찮은 일로 실수를 저지르는 수가 있는데....너무 아량이 없어요....

◇손소희(작가)씨의 말 = 이후락 공보실작이 박 의장 면담을 알선하기로 약속했는데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지연되었다. 박 의장의 관대한 최종 확인을 기대했었는데 뜻밖의 일이다.

◇소설가 장덕조 여사 담 = 어마! 그랬어요?(울먹이며 말을 못한다.) 집행.....그게....정말이에요.... 박 의장 만나기로 했었는데...결국 「사형」을... 아이구...(울기시작) 말을 못하겠어요...조금 진정한 다음에 글을 쓰든지 하겠어요....아이구.... 우리가 박 의장을 만났더라면... 떼를 쓰든지 했을텐데.....아유 몸이 아파요. 전화를 끊어주세요.....(전화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이종선(이화여대) 양의 말 = 물론 상사를 죽였기 때문에 군기를 생명으로 하는 엄격한 군대에서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일병은 자신에 대해 최대의 모욕을 받았고 정신의 순수성을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최일병 사건을 계기로 우리 민도가 높아져서 남을 죽이는 일도 없어져야 하겠지만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권리, 개선 등을 존중하는 사회 기풍을 만들어야겠다.

◇이종렬(가정주부ㆍ43) 여사의 말 = 비참한 시작이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딸 가진 어머니로서는 더구나 가슴아픈얘기이다. 군대사회에서도 애정이라는 것이 이해되었으면 좋겠다. 상관과 부하의 사이도 단순히 군기에 의한 맺음뿐이 아니라 흐뭇한 인간관계로 맺어져야 하겠다. 이번 일은 사형 집행으로써 모든것이 끝날것이 아니고 군대에 간 아들을 가진 어머니 또 딸을 가진 어머니 그리고 군인 사회에 어떤 경종이 되어야 하겠다.

 

최군은 이날 하오 2시경 수감중이던 서울교도소에서 군「지프」에 실려 서울 근교 수색에 있는 OO사단 내 뒷산 사격장에 실려갔다.

이날 군 관계 사형수인 다른 네명도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은 지난 15일 국방장관에 의해 내려졌다.

Oㅡ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인정신문에서 최군은 몹시 흥분된 어조로 이름 계급 소속부대 나이 등을 대었다.
입회한 군목 H 대위로부터 "유언이 있느냐"는 물음을 받고 그는 "어머님 생전에 몹쓸죄를 짓고 먼저 가는 몸 송구스럽다. 그 동안 많은 걱정을 끼쳐드린 동료나 장양(그의 애인)께 미안하기 짝이 없다"고 짤막한 말을 남겼다.

Oㅡ 곧이어 목사의 기도가 있은 다음 최군의 두 눈은 흰 수건으로 가려지고 사형대에 손과 발을 묶어놓았다.
10「미터」 앞엔 이미 헌병 5명이 「카르빈」 총을 겨누고 있었다.
지휘장교인 A 중위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사격은 시작되었다.
다섯발 중 한발은 공포, 나머지 실탄 네발 중 단 두발이 명중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렸다. 사형 집행 장소에는 육군 고등검찰부 검찰관 C 대위와 서기 K 중사 그리고 군의관, 군목 등이 입회했다.

Oㅡ 최군은 지난 3월 1일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각계에서 재심을 해달라는 진정이 있었다.
1, 2 심 검찰관들도 그의 범행동기를 참작하여 재심 청구의 기회를 주도록 상부에 상신했었지만 고위층에서 형 집행을 서둘렀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고 한다. 「군형법」에는 사형이 확정되면 6월 이내에 형을 집행하게 되었으나 재심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형 집행이 자동적으로 연기되는 것이다.

육군 보도부는 19일 상오 최영오(26)일병이 18일 하오 2시 40분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시체는 19일 상오 11시 15분 유가족에게 인계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판일지

◇보통군재에서 사형 = 62년 8월 3일 제 2군단 보통군법회의(재판장 = 김이택 중령)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고등군재에서도 사형 = 62년 10월 19일 열린 육군 고등군법회의(재판장 = 권승남 대령, 주심법무사 = 박돈식 대위)는 최영오가 제기한 공소를 기각하고 1심 판결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 2월 28일 하오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시켰다.

-사건 내용

◇최영오군은 서울 문리대 천문기상학과 4년때인 지난 61년 8월 1일 학보병으로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고독하고 회의적인 청년이었다.

최군은 2년전부터 사귀어온 그의 애인 장현숙(가명, S대생)양이 보내온 연서를 그의 상사 정방신 병장과 고한규 상병이 뜯어보고 희롱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항하다가 구타당하자 사감을 품고 62년 7월 8일 아침 8시 부대 내에서 전기 정, 고 양씨의 배후에서 총을 쏘아 사살했다는 것이다.

- 경향신문 1963년 3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