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보와 임관이 칙서(勅書)와 사부(賜賻)를 받들고 왕궁에 이르렀다. 백관 분사(百官分司)가 태평관에 나아가 앞에서 인도하고, 임금(태종)이 상장(喪杖)을 버리고 질(絰)을 벗고 최복(衰服)으로 대문 밖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정비(靜妃)의 곡위(哭位)를 경연청(經筵廳)에 베풀고 시녀(侍女)를 거느리고, 유장(帷帳)을 쳤다. 백관(百官)은 전정(殿庭)에 서립(序立)하였다. 사신이 정전(正殿)에 이르러 남향하여 서매, 임금이 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정전에 올라가 북향해 서서 사배(四拜)하고, 백관도 또한 사배하였다.
예(禮)가 끝나서 사신이 나가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문 밖까지 전송하였는데, 한결같이 의주(儀注)와 같이 하였다. 그 칙서(勅書)는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李) <휘(諱)>에게 칙(勅)하노라. 표문(表文)을 보고 왕의 아비(태조)가 훙서(薨逝)한 사실을 알게 되니, 참으로 매우 슬프다. 왕은 효정(孝情)이 도탑고 간절하니, 호모(號慕)하고 최훼(摧毁)하는 바가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대저 덕(德)을 닦아 아비를 현양(顯揚)하는 것은 효도(孝道)의 큰 것이다. 왕은 슬픈 것을 절도 있게 하고 일을 이루어 길이 도모(圖謀)할 것을 생각하라.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부의(賻儀)를 주는 바이니 이르거든 영수(領收)하라. 그러므로 칙(勅)한다. 견(絹) 5백 필, 포(布) 5백 필, 양(羊) 1백 공(鞚), 술 1백 병(甁)이다."
태종 8년(1408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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