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대군 추적북상!! 횡성 평창 접근·수도중심부돌입(1951년)
미군 4개사단을 포함하는 10만의 유엔군 대군을 20일 중부 한국회갈색저즌고지에 잠복하고 있는 중공군 및 북한괴뢰군을 공격하여 12리 이상을 전진하였다.
이 공격에는 미 제9 및 제10의 양 군단이 참가하였는데 그 전선은 54리에 이르렀다. 2일 전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로 시작된 이 도륙작전에 한국 진흙길을 북상하는 약 6만의 미군과 영국군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군 및 한국군이 참가하였다.
한국군 1개 사단은 산길을 따라 전진하여 38선남방 15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이에 대한 적의 저항은 산만하였다. 북한 괴뢰군의 일부는 공포에 사로잡혀 급속히 퇴각하였다. 또 다른 지점에서는 중공군이 산병호 내에서 전면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선에서는 공산군 약 4만이 배치되어있는데 여기에는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중공군 1개 사단이 포함되어있다.
이 전선은 서방 양편으로부터 동방으로 원주 북방을 지나 동남방으로 휘어 평창 남방 3리지점에 이르고 있다. 양평은 서울 동방 27리며 원주로부터오 이와 거의 같은 지점에 있다.
평창은 원주 동부 15리 지점에 위치한다. 이 강력한 연합군 공세의 제1차 목적은 원주 북방 10리 지점에 있는 횡성인것 같다. 즉 연합군 부대는 동시 동서양면으로부터 이곳에 접근하고있으며 또 다른 유엔군 일부대는 남방으로부터 공산군 방위진으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1년 2월 24일
1. 사건의 배경: 6·25 전쟁의 반격 서막
- 시기: 1951년 2월 (1·4 후퇴 이후 전열을 재정비한 시기)
- 참가 병력: 미군 4개 사단을 포함한 UN군 10만 명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군 등)
- 작전 지역: 중부전선 (양평-원주-평창-횡성 라인)
2. 주요 분석 포인트
① 리지웨이 장군의 '킬러 작전'과 맥아더 장군
기사에서 "2일 전 맥아더 장군의 진두지휘로 시작된 도륙작전"이라고 언급된 것은 1951년 2월 21일부터 시작된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을 의미합니다. 당시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지점 점령'보다는 '적군 살상'에 집중하는 섬멸전을 펼쳤습니다. 기사에서 사용된 '도륙작전'이라는 강한 표현은 당시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한 섬멸전 양상을 반영합니다.
②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 횡성(橫城)
기사는 연합군의 1차 목적지가 '횡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횡성은 원주 북방의 교통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해야만 중부전선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북진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동서남북 삼면에서 횡성을 압박하는 '포위 섬멸' 전략이 기사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③ 지리적 묘사와 거리 단위 (리)
기사에서 사용된 '리(里)' 단위는 현재와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는 대략 1리=0.4km로 계산하면 문맥이 통합니다.
- 전선 54리: 약 21km에 달하는 광범위한 전면 공격.
- 38선 남방 15리: 약 6km 앞까지 육박.
- 이러한 세세한 거리 묘사는 당시 전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는지 보여줍니다.
④ 적군의 상반된 반응: '산만'과 '완강'
북한군은 "공포에 사로잡혀 퇴각"하는 반면, 중공군은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중공군이 주력 부대로서 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북한군은 이전의 타격으로 인해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음을 시사합니다.
3. 시대적 맥락: 진흙길과 기후의 고통
"한국 진흙길을 북상하는"이라는 묘사에서 당시의 처절한 전장 환경을 알 수 있습니다. 2월의 한국은 해빙기로 접어들며 땅이 녹아 진흙탕이 되는 시기였고, 이는 중장비를 운용하는 UN군에게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연합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당시 UN군의 보급과 의지가 상당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