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형벌

서청에서 환어사 등을 친국하다

Lucidity1986 2022. 7. 17. 20:09

왕(광해군)이 〈서청(西廳)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는데,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원임 대신 심희수(沈喜壽), 의금부 당상 박승종(朴承宗)·유공량(柳公亮)·조존세(趙存世)·정엽(鄭曄), 대사헌 송순(宋諄), 대사간 유숙(柳潚), 승지 이덕형(李德泂)·이춘원(李春元)·권진(權縉)·김지남(金止男)·신경락(申景洛), 사관 변삼근(卞三近)·이유달(李惟達)·유여항(柳汝恒)·한옥(韓玉), 가주서 이배원(李培元)이 입시하였다.〉 환어사(喚御史/임해군의 첩)에게 압슬형을 가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예숙(禮叔) 이하 환어사와 연루된 사람이 여덟 명이었는데 모두 국문에 불복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환어사에게 형을 더 가하라."

하니, 환어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청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환어사가 말하겠다는 것은 변명하려는 것이니 듣지 말고 자복하겠다고 하면 들어준다고 하라."

하자, 환어사가 마침내 자복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역관 이운상(李雲祥)이 서울에 있는가? 속히 잡아가두도록 하라."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무신년 옥사에 이 사람도 역적의 입에서 이름이 나왔습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역관의 성명과 그와 7년간 같이 산 주인도 차례대로 묻도록 하라. 역적 이진(李珒)과 역관이 명나라에 서 모의할 때 은자를 지급한 사람의 성명과 출입한 아무아무와 그 연월일을 모두 세세히 묻도록 하라. 정미년의 일과 종실 등과 같이 비밀히 의논한 일을 자세히 고하면 결박을 풀어주겠다."

하였으나, 환어사가 말이 없었다. 왕이 이르기를,

"역적 진이 누구의 사주를 듣고 음모를 꾸몄는가? 또 잠시 결박을 풀어주고 죽을 마시게 하여 그의 기운이 소생하거든 신문하라."

하였다. 권진이 아뢰기를,

"환어사의 기운이 이미 막혀서 말을 하지 못합니다."

하자,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하옥하여 치료시키고 후일을 기다려 다시 신문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구료하게 하였으나 환어사가 옥중에서 죽었다.

환어사는 일개 창녀이고 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가 도망친 것도 본디 죄를 짓고 몸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역(大逆)과 같이 다스렸는가 하면 심지어 저자에서 소급해 형벌을 시행하였으니, 역적을 이처럼 혹독하게 다스렸다. 

광해군 6년(1614년) 9월 3일

 

📘 [분석] 광해군의 친국(親鞫)과 '환어사' 사건 — 공포정치의 일면

광해군 6년, 임해군 관련 옥사에서 등장하는 ‘환어사’는 이름조차 실리지 않은 여성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임해군의 첩이자, ‘환어사’라는 호칭으로만 불린다.
이 여성은 반역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국문(국가 재판) 대상이 되었고,
심문 과정에서 광해군이 친히 형벌을 명하고 심지어 자복을 유도하는 장면까지 상세히 묘사된다.

1. 👑 군왕의 친국 — 권력의 과시인가, 절차의 왜곡인가?

광해군은 서청(西廳)에 나아가 직접 친국에 임하였다.
이는 통상적인 사법 절차에서 벗어난 ‘왕권의 직접 개입’이자,
광해군이 이 사건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듣지 말고 자복하겠다고 하면 들어주라”는 대사는
피의자의 진술을 유도하는 것으로, 오늘날 기준으로는 명백한 진술 강요에 해당한다.


2. 🩸 '압슬형'과 죽음 — ‘사실상 처형’으로 기능한 고문

환어사에게 가해진 형벌은 ‘압슬형’으로,
무릎 사이를 압착해 극심한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

형벌 도중 “말이 있다”고 청했지만, 광해군은
“변명이다, 듣지 말라”고 지시한다.
결국 의식을 잃은 뒤 옥중 사망에 이르렀고,
대신들은 치료 후 재신문을 청했으나 때는 늦었다.

이는 물리적 폭력이 진술을 대신한 정치적 재판이었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공포 정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실현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 🧾 창녀의 국문, ‘연루되지 않은 자에 대한 국가 폭력’

마지막 부분에서 실록은 이렇게 평가한다:

“환어사는 일개 창녀이고 또 연루되지 않았으며, 도망친 것도 본디 죄를 짓고 몸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그녀는 실질적 혐의 입증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임해군과의 사적 관계’와 '증언 가능성'만으로 국가적 고문과 사망에 이른 셈이다.

그녀의 죽음은 한 인간의 존엄성이 ‘국가의 불안정한 권력구조’ 앞에서 얼마나 쉽게 소거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 정리하며 — 광해군 정권의 심리

환어사의 사례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서,
광해군이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보여주었던 의심, 불안, 그리고 공포통치의 기제를 드러낸다.

그는 친족이자 잠재적 정적이었던 임해군과 그 주변 인물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숙청하려 했으며,
심지어 사법 절차마저 왕권의 도구로 변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