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영, 이유회 사형집행(1957년)
김 중장 살해 1년 8개월만인 24일 상오 10시 3분에
최후 알린 6발의 총성
대구교외 육군 정보학교 훈련장에서 총살
가족의 면회도 불허
삼엄한 경호 하 형장으로
화제와 파란의 연속선을 이루어오던 운명의 사형수 전 육군대령 허태영을 24일 상오 10시 3분 이곳 대구 교외 칠곡군 지천면 산락동 산기슭(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그를 따르던 운전수 이유회와 함께 '총살'로써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날 10시 3분에 총성 2발, 동 4분에 또 2발, 잠시 있다가 1발, 또 1발 도합 총성 6발이 허태영과 이유회의 최후를 알리는 신호같이 들렸다.
이날 허태영과 이유회는 상오 9시 반 '앰브렌스'로 헌병들의 삼엄한 경호 아래 극비밀리에 형장으로 압송되었으며 가족들에 대한 면회도 불허되었고 또한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총살형'은 '육군총살집행규정'에 의하여 1명의 군의관 그리고 군목, 검찰관, 수사기관 각 1명씩이 입회한 가운데 집행장교(헌병중위)의 지휘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한편 동 시체는 육군에 의하여 화장되고 '유골' 로서 가족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에 앞서 김정렬 국방부장관은 23일 하오 4시 10분 군 출입기자단과 긴급회견을 하고 다음과 같이 허태영과 이유회에 대한 형 집행을 공표하였다.
◇국방부발표 = 이미 고등군법회의에서 확정된 사형수 '허태영' 동 '이유회' 에 대하여 좌기와 여히 집행한다.
▲일시 = 4290년(*1957년) 9월 24일
▲장소 = 대구
▲참여자 = 집행관계관 신문기자 2명 이하
-동아일보 1957년 9월 25일
1. 사건의 성격: '군부 내 갈등과 암살의 최후'
- 피고인: 허태영(전 육군 대령, 제2군사령부 공병부장), 이유회(운전수).
- 죄목: 김창룡 육군 중장 살해 및 공모.
- 집행 방식: 총살형 (육군 집행 규정에 따른 군인 사형 집행 방식).
- 집행 장소: 대구 칠곡군 지천면 산기슭 (육군정보학교 훈련장).
2. 주요 분석 포인트
① 군인 사형 집행의 전형: 총살형
기사에서 묘사된 "도합 총성 6발"은 군형법에 따른 총살형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보통 사형수 한 명당 집행 대원들이 동시에 사격하며, 절명을 확인하기 위한 확인 사격이 이어집니다. 허태영과 이유회 두 사람에 대해 각각 3발씩 혹은 순차적으로 집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민간인의 교수형과 달리 군인에게는 총살형을 집행하는 것이 당시의 법적 원칙이었습니다.
② 철저한 비밀 유지와 면회 불허
"극비밀리에 형장으로 압송되었으며 가족들에 대한 면회도 불허"되었다는 대목에서 당시 정권이 이 사건의 마무리를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허태영은 재판 과정에서 김창룡의 비리와 전횡을 폭로하며 "군 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나 가족과의 대화가 외부로 흘러나가 여론을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국이 철저히 차단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③ 김창룡 중장과 허태영 대령의 관계
암살된 김창룡은 육군 특무부대장으로서 수많은 간첩 검거 성과를 냈으나, 한편으로는 무리한 수사와 조작으로 많은 군 내외 인사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허태영 대령은 그 아래에서 일하며 김창룡의 독단과 횡포에 환멸을 느꼈고, 결국 "나라를 위해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암살을 결행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범죄를 넘어 군 내부의 권력 암투와 부조리가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④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기록의 함의
유서가 없다는 발표는 실제 그가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기득권층에 치명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당국에 의해 파기되었거나 묵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사건 발생 1년 8개월 만의 전격적인 집행은 이 사건이 가진 정치적 부담감을 털어내려는 조치였습니다.
3. 시대적 맥락: 이승만 정권의 권력 구조
1950년대 후반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 속에서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입니다. 김창룡은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군뿐만 아니라 정치권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런 김창룡의 죽음은 정권의 한 축이 무너지는 대사건이었으며, 배후에 더 높은 고위급 지휘관(강문봉 중장 등)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군 사법 역사상 최대의 스캔들로 기록되었습니다.
사건 요약 및 집행 현황 (1957. 09. 24.)
| 항목 | 상세 내용 |
| 사형 집행 대상 | 허태영(전 대령), 이유회(운전수) |
| 집행 명령권자 | 김정렬 국방부 장관 |
| 집행 시각 | 오전 10시 3분 시작 (총 6발의 총성) |
| 사후 처리 | 화장 후 유골로 가족에게 전달 |
| 특이 사항 | 가족 면회 일체 거부, 신문기자 2명 이내로 취재 제한 |
4. 시사점
허태영 대령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행위가 '군 정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 조직 내에서 상급자의 부조리를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남겼습니다. 동시에 암살 대상이었던 김창룡의 과실과 허태영의 극단적 선택 모두 한국 전쟁 이후 불안정했던 대한민국 군대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