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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07 100인 참수 경쟁
  2. 2013.07.07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의 물량
  3. 2013.05.01 8월 폭풍 작전
  4. 2013.05.01 다운폴 작전
  5. 2013.05.01 병자호란(1636)
  6. 2013.05.01 나당 전쟁(670~676)
  7. 2012.12.19 러시아 원정
  8. 2012.12.17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posted by Lucidity1986 2013.07.07 13:48

100인 참수 경쟁(100人斬首競爭)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에서 일본의 두 군인들이 누가 먼저 100인을 군도로 살해하는지를 겨뤘다는 사건이다.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 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패전 이후 이들은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그리고 최후까지 자신들은 결코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으며, 신문 보도도 단순한 창작 기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도 무카이 소위의 딸과 노다 소위의 아내, 손녀가 현재 일본의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받으며 대법원에서 재판을 했으나 패소했다.


당시 신문 기사



이 100인 목베기 경쟁 외에도 300목베기를 달성한 다나카 군키치 육군 대위의 이야기도 1940년 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되었는데, 다나카 군키치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 두 소위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역시 최후까지 자신도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谷寿夫)와 무카이, 노다 소위와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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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3.07.0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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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3.05.01 02:50

뤼순의 해군 기지를 점령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육전대 병사들

뤼순의 해군 기지를 점령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육전대 병사들

 

날짜 : 1945년 8월 9일~20일

교전국

일본 제국/만주국/몽강국 vs 소비에트 연방/몽골 인민 공화국

병력

일본군+만주국군+몽강국군 1,250,000명/포 6,700문/차량 1,215대/전차 1,000대/항공기 1,800대

vs

소련군+몽골군 1,593,255명/포 26,137문/차량 1,825대/전차 3,704대/항공기 5,368대

 

 

8월 폭풍 작전 또는 만주 전투(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 連対日参戦 (れんたいにちさんせん))1945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으며, 소비에트 연방만주국을 멸망시켰고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 등의 일본 제국의 북방 영토를 빼앗아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만들었다. 소련군은 만주38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몽강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월 8일(모스크바 표준시로 5월 9일 0시 43분)에서 3개월이 지난 8월 9일에 이루어졌다. 8월 6일 히로시마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0,000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1. 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년 4월에 일-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년 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1,000,000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8월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을 부여했다. 그러나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월 8일 오후 5시(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은 8일 오후 11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일 불가침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월 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2.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관동군은 계속되는 전황 악화 속에 주력 부대가 꾸준히 차출당하고, 신규 편성 부대 등으로 그 공백을 메꾸고 있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1945년 8월 당시 관동군은 31개 사단, 12개 독립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보병이었고, 31개 사단 중 25개 사단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750,000명에 이르는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29,000,000 명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대싱안령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제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3. 소련군의 공격 준비

스탈린만주 공격을 위한 총 책임자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소련군은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전략방면군을 창설하고 그 사령관에는 바실렙스키가 취임했다.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제1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제2극동전선군에는 전 칼리닌전선군 사령관푸르카예프 상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유마셰프 해군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년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6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4. 전개

소련군블라디보스토크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제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월 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월 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다.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 중부의 개성시(8월 23일 진주, 9월 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38선 이북으로 철수)과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권 안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5.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괴뢰 국가만주국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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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3.05.01 02:40

다운폴 작전(영어: Operation Downfall)은, 연합국일본 제국 내지를 침공하기 위한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이 계획은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 폭탄 투하일본의 항복, 8월 폭풍 작전으로 인한 소련의 침공으로 중단되었다. 이 작전은 올림픽과 코로넷으로 나뉘었다.

1945년 8월에 시작하는 이 작전은 올림픽은 오키나와 전투 이후 일본 남부의 규슈 섬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그 후, 1946년 봄의 코로넷 작전은 혼슈 섬도쿄 근처 간토 평야 점령을 목적으로 하였다. 올림픽 작전에서 점령된 규슈 섬의 토지를 이용해 공중 지원을 하기로 예정되었다.

일본의 지리뿐 아니라, 일본 침략 계획은 매우 명로하여 그들은 정확하게 연합군의 침공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케수고 작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일본인은 규슈 점령 후, 작은 구역에서 방어 계획을 세웠다.

사상자 예측은 광범위하지만, 일본 민간인의 저항 정도에 따라서 예측은 연합군 사망자가 수백만 명으로 예측되고, 그리고 일본인 사망자도 매우 클 것으로 예측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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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3.05.01 02:24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에서 1637년 1월간에 과 조선이 한 전쟁으로, 홍타이지조선에 제2차로 침입하여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최대 패배인데 고려 무신정권은 대몽(對蒙) 항쟁을 40여 년간 지속하였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이나 버텼는데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이 굴복하여 끝났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국가와 국가 간에 한 전쟁이므로 '호란'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1. 개요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로서 맹약한 조선은 강화조약을 하고서도 친명배금 정책을 견지하였다.

당시 으로 국호를 고친 숭덕제 홍타이지는 대명(對明) 전면전 전(前)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고 기근으로 말미암은 경제상 위기를 타개하려고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키려 했으며, 1636년 12월 10만 대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정벌했다.

이들에게서 도망쳐 남한산성으로 조정을 옮긴 인조는 대항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말미암아 대배하고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면서[찧으면서] 굴욕스럽게 항복하였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비롯한 수십여 인이 에 포로로서 끌려간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청군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무시하고 쾌속 진격하여 인조를 생포만을 목표했으므로, 임진왜란과 달리 단기전으로 끝났으나 수십만 인이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가 황폐화하는 등 그 피해는 매우 큰 데다가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소중화를 자처하하면서 을 떠받들던 조선 조정은 엄청난 공황(恐惶)에 빠지고 크게 충격받았으며, 이후 군담소설인 《임경업전》이나 《박씨전》의 소재가 될 정도로 조선인은 정신상 상처를 입었고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정립된 과 조선의 역학관계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대조선(對朝鮮) 종주권을 포기할 때까지 약 250여 년간 계속되었다.

 

2. 배경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이 몽골에 침략받아 멸망한 후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이 사람들은 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걸출한 인물인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여진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는데 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갔고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누르하치가 대전(對明戰)을 선포하고 공격해 수세에 몰리자 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여 화평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1623년 서인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 대조선(大朝鮮)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3. 전쟁 발발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0만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한 사실은 한성에 12월 12일에 알려진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군해 있었다. 청군의 남하 소식을 듣고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청군의 진군 속도가 빨라서 시간이 부족하자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4.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초집(抄集)하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別動隊)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각 근왕군의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가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쳐 몰래 보낸 글을 받았다. 정세규는 즉시 근왕군을 규합,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월 2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이번에도 청군의 별동대가 험천 서(西)에 있는 고지를 점령 후 근왕군을 요격(邀擊)했다. 근왕군은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도절시진(刀折矢盡)했고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를 위시해 지휘관 다수 전사했으므로 더는 성과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평안병사 유림 휘하의 병력을 합세, 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1637년 1월 28일 강원도 금화 부근에서 청군과 한 전투에서 홍명구는 전사했고 유림은 고지에 주둔하면서 공격해 온 청군을 격퇴(擊退)에는 성공했으나 도절시진(刀折矢盡)하여 부득이(不得已) 퇴각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29일 병력 6000여를 초집(抄集)한 그 남자는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조우(遭遇)했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불가부득(不可不得) 수원으로 퇴각하였으며,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를 패배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撤收)하였다.

4-1. 쌍령 전투

일변(一邊)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속오군 편제상 총병력 4만이 모두 집결해 있었는지를 놓고 이론(異論)할 여지가 있지만,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광주의 쌍령 근처까지 진출했다.

이 병사들을 저지(沮止)하려고 인근(隣近) 불당리에 매복(埋伏)하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 칼과 창을 주 무기로 삼아 최후 돌격 단계에서 적에게 돌진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구실을 하는 병사 1천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였다.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청군 기병 3백 기(騎)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조총으로 중무장한 8천여 조선군은 겁먹은 채 거리(距離)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토붕와해(土崩瓦解)시키고 허완도 도할(屠割)한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분투(奮鬪)했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했고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둔진(屯陣)하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5. 기근

청군이 기병 중심의 편제였던 데다가 그 진격 속도가 매우 신속했으므로, 전국 각지에서 군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다는 소문(所聞)이 돌았다. 조선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지만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한성을 향했고 각지의 근왕군도 청군의 별동대에 격파당하여 조선군은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이었다.

인조는 근왕군 후퇴에 당황했고 청군을 피해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것이 조선군이 청군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무력(無力)을 없애지는 못했으며, 조선군은 당초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과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군사 1만2천과 백성 수만을 지탱(支撐)할 비축(備蓄) 물자가 없었다.

쌍령 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호한(冱寒)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고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饑饉)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續出)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하려고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筆頭)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激烈)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물자 부족 탓에 지속(持續)될 수 없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口徑)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天惠)의 요새(要塞) 남한산성 벽을 타격(打擊)했고 직결(直結)하는 피해는 작았으나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소현세자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한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이것으로써 확실히 꺾이고 말았다.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6. 항복

항복할 한 화약(和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隻)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 하는 무역을 허락할 것.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조선 백성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봉림대군의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세칭(世稱)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이다.

한양은 종로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掠奪)과 방화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는 노력을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北伐)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과 연락하여 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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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3.05.01 01:57

나당 전쟁(羅唐戰爭)670년부터 676년까지 신라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신라는 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루고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중·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배경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신라의 내부 분열을 획책하면서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지역을 당나라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660년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그 지역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영토로 기정사실화하려 시도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전인 663년(문무왕 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당(唐)이 신라의 자주성을 부인하고 신라를 자국의 일개 지방행정구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시에는 아직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당나라와의 직접 마찰을 피하였다. 그러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신라를 관리하도록 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의도를 드러내자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은 백제 유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중국 세력과 건국때부터 싸워온 고구려 유민들을 앞세워 당과 전쟁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라는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金馬渚: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도읍을 정해주었다. 안승을 중심으로 결집한 고구려 유민들로 편성된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과 연합하여 대당(對唐)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통일 이후 신라의 9서당 군제에는 고구려 부흥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의 선제 공격

나당 전쟁은 670년 3월, 신라군 1만과 고구려 유민군 1만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라군은 옛 백제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 주둔군과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 백제의 왕족 출신)이 이끄는 백제군이 주둔하는 옛 백제 지역의 82개 성을 빼앗았으며,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당의 반격

이에 당나라는 671년, 설인귀에게 수군을 끌고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동원해 압록강으로 남침하였다. 육군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672년 7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면서 신라를 위협했지만,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되돌아갔다.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다.

당 고종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배후에서 도와주고 백제의 옛 땅을 무력으로 강탈했다는 이유로 674년에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여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는 신라에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책략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675년 9월,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유학생)이었던 풍훈(風訓)을 길라잡이로 삼아 다시 쳐들어왔으나 천성 전투에서 패하고 철수했다. 같은 해 9월말부터는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매소성(買肖城, 현 경기도 연천군)에 주둔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반격과 승리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여명 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신라군과 당군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18차례에 걸쳐 벌였다.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伎伐浦: 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끈 당의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 수행의 의지를 상실했다.

전쟁 결과

당나라는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을 요동성으로 옮기고, 웅진도독부는 건안성(建安城: 개평)으로 옮기면서 대동강 북쪽으로 완전히 철수하였다.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리로 대동강부터 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지역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전쟁 후 양국

전후 신라와 당의 관계는 50여년간 소원했으나, 신생국인 발해가 강성해지자 다시 가까워져 무역 및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발해의 남쪽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폭설 등 험한 날씨로 인해 중도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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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2.12.19 05:20

러시아 원정은 1812년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러시아 제국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을 가리킨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 전쟁의 완패를 계기로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조국 전쟁이라 부르며 나폴레옹 스스로는 이 전쟁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명명했다.


Napoleons retreat from moscow.jpg



1.배경


1807년 체결된 틸지트 조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 나폴레옹의 동맹국이 되었고 1806년 베를린에서 나폴레옹이 선포한 대륙 봉쇄에 참가했다. 1808년 가을 동맹 경신 외에는 별로 양국의 우호 관계 증진에 이바지하는 바 없이 끝난 에어푸르트 회담 이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과의 혼인을 제안했으나 혼담이 별 진전이 없자 대신 1810년 4월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북해 발틱 해에 면해 있는 지방에선 대륙 봉쇄를 피해 영국과의 밀수가 성행했는데 나폴레옹은 여기에 강경하게 대응해 1810년 7월에는 네덜란드 왕국을, 12월에는 북해에 인접해 있는 독일 북서부에서 발틱 해의 항구 도시 뤼베크까지를 프랑스 제국에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매제가 공작으로 있던 올덴부르크 공국 역시 나폴레옹이 자신과의 상의 없이 병합하자 안 그래도 자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던 대륙 봉쇄에서 사실상 탈퇴해 자주적 조건으로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이처럼 대륙 봉쇄를 둘러싸고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양국은 1811년부터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외교적인 해결은 대륙 봉쇄의 준수를 고집하는 나폴레옹의 태도로 인해 결실을 맺기 힘들었는데 원래 대륙 봉쇄 자체가 전 유럽 대륙을 망라하고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없는 정책이었기에 영국과의 교역량이 적잖은 러시아에게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목적에 반하는 일이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대승 이후 해군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영국에 대해선 끝내 상당한 양보를 통한 타협을 거부하고 경제적 압박이란 수단으로 대결하기로 결정한 이상 나폴레옹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프랑스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진 러시아를 꺾고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사 행동을 일으켜 상황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로 결심하고 선제 공격을 계획한다.


2. 병력 확보


프랑스는 유럽 대륙 중서부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세력이 되어 있었는데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대군을 독일 동부와 바르샤바 공국으로 전진 배치하는 한편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위성국, 동맹국들에게도 참전을 요구하여 전체 원정군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인마를 이들 나라에게서 징집하고 또한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데 일조하도록 했다. 라인 동맹가입 국가들,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 바르샤바 공국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센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대패하고 틸지트 회담에서 러시아의 뜻이 반영되어 멸망을 모면한 후 영토의 절반을 잃고 군사력을 제한받는 등 주권을 상당 부분 상실했는데, 다른 대다수 독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원정군의 국내 통과는 물론이고 군비 제공과 원정군 참가에도 동의해야 했다. 특히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프로이센에 원정군이 밀집하게 되었다. 요르크 중장이 통솔하는 파견 부대가 라트비아로 전진하는 원정군 좌익에 속하게 되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배하고 역시 존망의 위기에 빠졌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여전히 강국으로 존속하는 것을 허용받고, 메테르니히 백작의 주도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1810년 황녀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과 결혼하여 황실이 인척 관계가 된 오스트리아로는 원정군 본대가 통과하지 않게 되었는데, 역시 참전 요청에 응해 슈바르첸베르크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만여 병력을 원정군의 우익으로 러시아에 면한 갈리시아에서 출병시켰다.

스웨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입해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선 다음에도 계속 영국과의 동맹을 고수하다가 1808년 이를 명분으로 한 러시아의 침입을 받고 7세기 이상 유지해온 핀란드를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이었던 구스타프 4세가 폐위당하고 아들이 없는 카를 13세가 즉위하여 1810년 나폴레옹의 소극적 지지 하에 프랑스의 원수 베르나도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왕세자와 스웨덴군 총사령관에 오른 후 실권을 획득한 베르나도트는 자주중립노선을 추구, 이중 외교를 통해 한편으로는 나폴레옹의 요구에 부합하여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와 동맹해 대륙 봉쇄에 참가하고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동시에 영국, 러시아와 비밀리에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1811년 정월에는 나폴레옹이 의도한 덴마크, 바르샤바 공국과의 친프랑스적 동맹을 결성하기를 거부했다. 베르나도트는 러시아에 잃은 핀란드를 되찾기보다는 당시 덴마크에 속한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데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였는데 덴마크는 프랑스의 대영 전쟁을 위해 중요한 동맹국이었으므로 노르웨이의 일부를 댓가로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대 러시아 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전한다는 베르나도트의 제안을 나폴레옹이 수락할 리가 만무했다. 교섭이 결렬되자 1812년 2월 프랑스군이 당시 스웨덴 령이었던 독일 북부의 포메른 뤼겐 섬을 점거했고 여기에 반발해 스웨덴은 영국, 러시아 측에 가담했다.

폴란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한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1795년 지도상에서 사라졌는데 1807년 나폴레옹 프로이센 폴란드 분할 때 차지했던 영토를 전부 몰수하여 이 땅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웠다.

 바르샤바 공국 동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 군의 전진기지가 되었는데 한 국가로서는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원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폴란드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비스와 군대라는 명칭을 썼다. 러시아 측에서도 폴란드 인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한때는 독립한 폴란드 왕국의 재건을 암시하기도 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에는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왕을 겸하게 되어 이 발안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러시아에 살던 폴란드 인들은 나폴레옹의 독립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원정에 그다지 열광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러시아 1806년 오스만 제국에 복속해 있던 도나우 강 연안의 몰도바 왈라키아로 진주하자 러시아에 선전포고해 1812년까지 러시아군이 우세한 가운데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원정이 가까워자자 러시아는 점령한 땅의 일부를 되돌려주고 1812년 5월 말에 부쿠레슈티에서 강화를 체결했다. 그 전에 이미 러시아 군과 교전하던 오스만 제국군은 연패하고 일부는 쿠투조프에게 항복했으므로 이 방면에서의 러시아에 대한 위협은 더 이상 없었다. 이 곳에 종사하던 수만 병력은 대 나폴레옹 전선으로 보내졌다.

러시아 틸지트 조약 체결 후에도 이전의 대프랑스 동맹 상대였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전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냉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프로이센을 우대해 개인적인 친분도 있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루이제 왕비를 수도상트페테르부르크로 초대하는 등 우호 관계를 지속시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러시아로의 파병을 승인한 후 알렉산드르에게 편지로 "부디 본인을 책망은 하되 저버리지는 마십시오. 어쩌면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서로 긴밀히 협력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전하여 사실 러시아와 싸울 의향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1809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가자 명목상 프랑스와 동맹해 있던 러시아는 관망적인 태도를 취하며 오스트리아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하고 무장 중립을 지켰다. 빈에 주재하던 러시아 대사는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로 진격은 할 것이나 실제로는 전쟁 의사가 거의 없으므로 가능한 한 소극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스웨덴에게는 핀란드를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실권을 쥔 베르나도트에게 노르웨이를 약속해 연합 상대로 만들었으며 베르나도트는 대프랑스 전쟁에 임하는 차르를 자문했다.

사이가 얼마간 소원해졌던 영국과는 무역 재개 이후부터 사실상 연대해 프랑스와의 전쟁 발발 이후 곧바로 동맹을 맺었다. 1812년 4월부터 알렉산드르 1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전선에 가까운 빌뉴스에 사령부를 차리고 머물렀다. 6월 12일 러시아 대사인 쿠라킨 공작은 파리를 떠났고 그 직후 나폴레옹 역시 스스로 지휘할 본대가 집결해 있는 바르샤바 공국으로 향했다.

6월 22일 나폴레옹은 제2차 폴란드 전쟁을 공표하고, 6월 24일 네만 강 도강으로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었다.


3. 전쟁 발발부터 발루티노 전투까지


1812년 6월 24일 프랑스군이 국경인 네만 강을 넘어 러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바클레이 데 톨리가 지휘하는 러시아의 제 1 서부군은 10만여 이상의 대군이었으나 나폴레옹군에 비하면 그래도 크게 열세였다. 데 톨리는 네만 강가의 흐로드나 카우나스에서 원정군의 전위 부대와 맞닥뜨린 후 가망 없어 보이는 싸움을 피해 빌뉴스를 버리고 드리사로 후퇴하면서 좀 더 남서쪽 국경 지대에 주둔해 있던 바그라티온이 지휘하는 약 3만여 명의 제 2 서부군에게 합류를 요구했다. 빌뉴스에서 후퇴한 후 알렉산드르 1세는 데 톨리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주고 모스크바를 경유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드리사 요새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으면 전장으로 선택할 드리사 주변의 주요 거점으로 쓰기 위해 세운 시설이었지만 원정군의 우세를 감당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한 데 톨리는 드리사 역시 포기하고 내륙으로의 후퇴를 계속했다. 7월 중순에는 마크도날의 군대가 리가를 점령했다. 프로이센군 2만 3천명이 주력인 이 방면의 3만 2천여 원정군은 더 이상 공세로 나가지 않고 12월까지 라트비아에 주둔했다.

7월 한여름의 무더움과 강행군으로 인한 인마의 손실이 유난히 높았다. 특히 말먹이 풀의 부족은 큰 전투 없이도 원정 초반 거의 10만에 달하던 원정군 기병을 점차 와해할 정도였다. 위생 환경은 극도로 불량해서 행군로 주변에 시체와 오물이 널렸고 위생대의 수송 물자들은 다른 수레들처럼 뒤에 처져서 제대로 필요한 의약품을 적시에 공급할 처지가 못 되었다. 티푸스 등의 전염병도 돌기 시작해 나중에 겨울이 되자 죽은 동료의 옷마저 껴입는 일이 허다해졌을 때 이로 인해 병이 빠르게 퍼지게 되었다. 탈영병도 속출했는데 이들은 붙잡히면 대개 총살되었으므로 전쟁으로 인한 어수선함을 기회로 여겨 주위를 약탈하며 떠돌거나 은적했다. 낙오자들도 적지 않게 생겼는데 이들에게는 코자크 족이나 러시아 농부들의 습격 등으로 인한 위험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양군이 소비하는 식량과 물자는 엄청났고 원정군은 보통 러시아군이 후퇴한 길을 따라 이동했으므로 행군로 인근은 양쪽에 의해 완전히 털리게 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전투보다는 기타 악조건과 군기 저하로 인해 나폴레옹군 본대는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폴라즈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도록 비트겐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는 2만 5천의 병력을 남겨둔 데 톨리는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쪽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비텝스크로 이동했다. 러시아의 두 서부군은 여기서 합류해 원정군에 대항할 계획이었으나 7월 23일에 마힐루에서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바그라티온의 군대가 패하고 비텝스크로 가는 길이 막혔다. 그 결과 스몰렌스크가 새로운 합류 지점으로 선별되었고 데 톨리는 휘하 전군과 함께 비텝스크를 떠나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7월 28일 무방비 상태의 비텝스크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진격을 멈추고 도시를 겨울 숙영지로 선택했다.

그러나 우세를 이용해 러시아군 본대와 승부를 가리기로 마음먹은 나폴레옹은 추격을 곧 재개했고 8월 초에 드디어 합류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군도 퇴각을 그만두고 전투 태세에 들어가 8월 중반 스몰렌스크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데 톨리는 스몰렌스크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전개했는데 바그라티온이 이끌고 온 3만여 명은 도시를 방위하도록 하고 나머지 10만여 병력은 날개와 후방의 도로고부시에 배치했다. 원정군의 대대적인 포격을 받게 된 스몰렌스크는 목재 건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의도적 방화까지 겹쳐 거의 잿더미가 되었다. 나폴레옹군이 계속 도시 중심부로 육박해오자 데 톨리는 결전을 피해 군대에게 도시를 벗어나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스몰렌스크 공격을 최전선에서 지휘하던  원수는 3만여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추격해 다음 날 데 톨리가 직접 지휘하는 4만여 명의 러시아군 후위대와 발루티노 전투를 치렀다. 이는 무승부로 끝났고 러시아군은 퇴각할 기회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같은 시점 우디노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과 싸워 폴라즈크를 점령했으나 양측의 전력은 그 후에도 비등했으므로 이 방면에서 양군은 10월 중순, 핀란드에서 온 러시아의 증원군이 비트겐슈타인 군대와 합류하기까지 서로를 견제하며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우디노 원수를 대신해 생 시르 대장이 한동안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4. 보르디노 전투와 모스크바 입성


알렉산드르 1세는 8월 20일 데 톨리를 쿠투조프로 교체했다. 쿠투조프는 내륙으로 후퇴하여 나폴레옹의 본대를 병참에서 계속 멀어지게 한다는 기본 전략을 변경하진 않고 군대를 동쪽의 그쟈즈크(오늘날의 가가린 시)로 물렸다. 참모장 베니히센이 여기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에 반대해 쿠투조프의 러시아군 본대는 또다시 동쪽으로 후퇴, 9월 초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약 1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보로디노에 도착했다.

여기서 러시아군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 부근에서 뒤따라온 나폴레옹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보로디노 전투다. 양군은 각각 13만여 병력에 600여 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어 숫적으로는 거의 대등했다. 전투 초반은 나폴레옹의 뜻대로 풀려 외젠 드 보아르네가 이끄는 좌익은 보로디노 마을을 점거한 다음 우익에 포진해 있던 러시아군 주력을 묶었고 다부가 이끄는 중앙의 주력은 러시아군 제 1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에 성공하고 우익은 러시아군 극좌익을 무너뜨리고 지휘관 투취코프 장군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포니아토프스키의 기병대가 러시아군 좌익을 우회하는 것을 심하게 방해받아 결국 정면 공격만 남게 되었고 끝없는 포격으로 인해 연기가 전장의 시야를 가린 상황에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전력의 3할 이상을 잃은 데다 나폴레옹의 근위대가 개입하는 것을 염려한 쿠투조프가 퇴각을 지시하고 나폴레옹은 사투를 벌인 병사들의 상태를 참작해 추격 명령을 내리지 않아 전투는 일단락되었다. 프랑스군도 거의 3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나폴레옹조차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이 경험한 가장 끔찍한 전투였다고 묘사했다. 이 전투에서는 수많은 상급 장교들도 희생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그라티온이다.

모스크바로 후퇴한 쿠투조프는 오히려 승리를 가장하고 승전보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었고 이를 접한 알렉산드를 1세는 쿠투조프를 원수로 임명했다. 모스크바 주민들이 처음에 피난을 가지 않은 데에는 이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쿠투조프는 9월 12일 모스크바를 단념하고 군대와 함께 멀리 떨어진 동부의 카잔 방향으로 퇴각했다. 9월 14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다른 대도시들과는 달리 모스크바에서는 환영하는 군중도, 정식 사절단도 없었고 나폴레옹은 무척 의아해했다.


5. 모스크바 대화재


1812년 9월 14일 나폴레옹은 목표하던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입성한 당일 밤, 이미 시내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다음날 아침까지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일 밤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했고 강한 바람을 타고 불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어 18일까지 목조 구조물이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는 모스크바에 있던 건물들의 7할 이상이 소실되었다. 이때 석조 건물이기도 한 크렘린 궁은 무사했다. 화재의 원인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는데 프랑스군의 실화라는 설도 있으나 당시 모스크바 총독으로 도시에 여전히 남아 있던 로스토프친 백작이 남은 수하들에게 명령해 실행한 고의적인 방화였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6.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체류와 교섭 시도


화재를 진압한 후 다시 크렘린 궁에 머무르면서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가 협상을 청해오기를 기다렸으나 무소식이었고 이에 스스로 평화 협정을 제안했으나 알렉산드르는 회답하지 않았다. 차르가 모스크바 함락 이후에도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교신을 몇 차례 더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시간만 흘렀다. 이 동안에 보로디노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던 러시아 군 본대는 병력과 물자를 보충할 여유를 얻었고 남부에서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이, 북부에서는 핀란드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이 나폴레옹군과의 거리를 계속 좁혀 왔다. 10월 초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에게도 교섭을 금지시켰고 나폴레옹은 재차 전쟁 발발 전까지 특무 대사로 러시아에 주재하던 로리스통 장군을 쿠투조프에게 사절로 파견했으나 결국 뜻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영국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강화를 맺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자금과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외교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나갔다. 모스크바의 함락 이후 러시아 상류층 사이에서도 프랑스와의 화평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해졌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끝내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협정이 성사되지 않은데다가 코자크 기병대가 수송대와 전령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지고 겨울이 다가오자 보급이 날이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철군을 결정했다. 이 무렵 핀란드에서 남하하던 러시아군이 비트겐슈타인의 군대와 합류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우세해진 전력으로 생 시르의 군대를 공격해 폴라즈크를 탈환했다. 10월 19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떠났고 10월 말에는 남아 있던 후위부대가 퇴각을 개시했다. 탈취한 물건들을 실은 수레가 가득했으나 부상병이나 환자들은 다수가 도시에 남겨져 운명에 맡겨졌다. 실제로 이들은 맨 먼저 입성한 코자크 족과 도시민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후에 빌나에서도 비슷한 참극이 벌어졌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이 꽤 되었는데 나폴레옹이 입성한 후에도 도망가지 않았던 이들은 원정군이 도시를 떠난 후 있을 보복이나 무질서 상황을 염려해 후퇴 행렬에 가담했다. 이 시점에서 모스크바를 떠난 나폴레옹군 본대는 대략 9만 명 정도였다.


7. 프랑스군의 후퇴


나폴레옹의 원정군은 모스크바에서 남서쪽 방향에 있는 칼루가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0월 24일,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외젠 드 보아르네의 군대가 쿠투조프가 전위 부대로 보낸 독투로프의 사단과 싸워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쿠투조프는 퇴각하는 원정군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추격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떠난지 얼마 안 된 10월 22일에서 23일 사이 파리에서 탈옥한 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의 사망과 임시 정부의 수립을 공언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파리 총독 윌랭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 부근에 예비 병력으로 남겨두었던 빅토르 페랭 원수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서쪽 길을 벗어나 모야이스크 쪽으로 방향을 돌려 모스크바로 진격할 때의 행군로에 다시 들어섰다. 주변이 이미 전번의 행군으로 인해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후퇴가 더욱 고단해졌다. 11월 초에는 비아즈마에서 밀로라도비치 장군이 지휘하는 한 러시아 군대가 다부의 후위대를 가로막고 전투를 벌였다. 비아즈마의 러시아군은 포병대의 우세를 활용해 원정군을 동요 상태로 몰아넣고 위기에 빠뜨렸으나 지원 병력 요청을 받은 쿠투조프가 삼천 명의 기병만 보내는 바람에 활로를 뚫는 데 성공한 원정군은 만여 명의 병력을 잃고 궁지를 벗어나 스몰렌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민스크를 새로운 목표 지점으로 선택하고 비트겐슈타인의 군대에게 연합해 대항하던 우디노와 빅토르 페랭에게 비텝스크 근방을 떠나 군대를 남쪽으로 인솔해 자신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 나폴레옹은 그 때까지 제일선에 투입되지 않았던 근위대와 함께 선두에 서고 외젠 드 보아르네, 다부, 최종적으로는 네의 군대가 차례로 뒤따르게 한 후 11월 중순 드네프르 강을 건널 지점으로 정한 오르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8. 크라스니 전투


나폴레옹이 근위대와 함께 중계점인 크라스니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방치한 후, 그가 온 길을 이미 주변부에서 대기하던 밀로라도비치의 러시아군이 단절하고 쿠투조프에게 이를 전했다. 모스크바에서 퇴각하기 시작한 원정군을 줄곧 남쪽에서 간격을 유지하며 추격해온 쿠투조프는 크라스니에 있는 나폴레옹의 근위대를 북쪽의 골리친, 서쪽에서 오는 토르마소프, 동쪽의 밀루라도비치의 군대와 협력해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크라스니로 향하던 외젠 드 보아르네의 군대는 길을 막은 밀루라도비치군의 공격으로 인해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천여 명을 잃고 간신히 목적지로 들어갔고 다음날 근방에 도착한 다부의 군대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나폴레옹은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오르샤로 통하는 서북쪽 길을 열어 두는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만여 명의 근위대와 함께 남동쪽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접근한 쿠투조프의 본대를 상대로 오히려 공세로 나갔다. 그러자 나폴레옹과의 정면 대결을 꺼린 쿠투조프는 월등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포격만 하며 전진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북쪽에서는 나폴레옹의 청년 근위대가 중심이 되어 골리친 군대의 소수 병력이 지키는 우바로보 마을을 공격해 빼앗고 다부의 군대가 크라스니로 진입하는 것을 원호했다. 밀로라도비치의 군대가 쿠투조프의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하자 틈이 생겼고 덕분에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크게 소모되어 있었던 다부의 군대는 크라스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골리친의 군대가 반격으로 나가 우월한 포병과 기병을 내세워 공격을 되풀이해서 6천명이 정원이었던 청년 근위대는 절반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마을을 다시 내주었다. 토르마소프의 군대가 서쪽에서 바싹 다가와 퇴로를 차단할 것을 우려한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한 네의 후위대를 기다리지 않고 오르샤로의 후퇴를 재개했다. 쿠투조프는 크라스니 마을을 되찾는 것으로 일단 만족했는데 이런 영문을 모르던 네의 8천여 병력과 수만 명의 인파는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주변에 집결한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되어 항복을 거부하고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탈출한 네와 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쿠투조프는 열세인 원정군을 완전히 격파할 호기를 놓쳤으나 그럼에도 공적을 인정받아 스몰렌스크 공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 시점 몰도바 주둔군 3만여 명을 이끌고 북상한 치챠고프는 민스크에 입성했다.


9. 베레지나 전투


나폴레옹은 남은 군대와 함께 오르샤에서 드네프르 강을 건너 빅토르 페랭과 우디노의 남은 3만여 정규군과 재결합해 약 5만 명의 체계 잡힌 병력과 그 절반 가량의 낙오병, 비전투원들을 움직이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군대가 비텝스크 일대를 탈환한 후 빅토르 페랭과 우디노의 군대를 뒤쫓아 남하하여 압박해오고 있었다. 치챠고프와 비트겐슈타인이 이끄는 두 군대가 합류한 후 원정군의 후퇴를 저지하며 쿠투조프의 본대와 연계해 공격해오면 탄약과 물자가 거의 다 떨어진 상황에서 여지없이 전멸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휘하 군대를 독려해 최대한 빨리 서쪽으로 가 바리사우에서 베레지나 강을 건너려고 했다. 이 즈음에는 기온이 다시 올라가 드네프르 강도, 베레지나 강도 얼어붙어 있지 않았다.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가 나폴레옹의 원정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전쟁은 여름에 시작되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입성할 무렵에는 가을이었고 그 무렵 나폴레옹군 본대는 이미 10만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크고 작은 전투와 병력의 분산을 고려해도 너무 적은 숫자로 이 때까지 적어도 15만 명이 넘는 병력이 다른 이유에서 와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을 시작한 10월 중순부터 추위가 닥쳐와 양측에 상당한 손실을 입힌 것은 사실로 당시 러시아군도 전원이 동계 전투에 잘 대비해 있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은 돔브로프스키의 연대를 바리사우에 먼저 보내어 수비하게 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치챠고프는 군대를 이끌고 민스크를 떠나 돔브로프스키를 공격, 5천여 병력의 저항을 분쇄하고 주변의 다리들을 파괴한 다음 강 좌안을 경비했다. 며칠 후 도착한 나폴레옹은 강 좌안에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 어떻게든 치챠고프의 주력을 도강 지점에서 떼어 놓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를 위해 몇몇 곳에서 동시에 도강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치챠고프는 원정군이 바리사우보다 하류에 위치한 지점을 골라 도강할 것이라고 오판해 주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덕분에 에블레 장군이 감독하는 나폴레옹군 공병대는 바리사우의 약간 상류에 있는 스투디안카 마을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다리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동반한 이동식 부교들은 드네프르 강을 건널 때 사용한 후 수거하지 못하고 없애버렸으므로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공병들은 알맞은 자재도 부족하고 한겨울에 강물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작업하는 등 험악한 조건을 딛고 두 개의 부교를 완성했다. 이렇게 해서 근위대를 포함한 나폴레옹군은 하루 이상 거의 방해받지 않고 강 너머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착각을 깨닫고 군대를 되돌린 치챠고프가 강 좌안을 방어하는 우디노와 네의 군대를 총공격했으나 저항도 격렬하여 교두보를 빼앗지 못했다. 한편 북쪽에서 접근한 비트겐슈타인의 군대는 아직도 강 우안에 있던 원정군을 공격하고 다리에 포격을 가했지만 빅토르 페랭이 이끄는 4천여 명의 후위 부대는 5배에 가까운 러시아군의 공격을 견뎌내었다. 부교는 자주 손상되었으나 주변에 널린 시체 등을 이용해서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다. 이날 밤 빅토르 페랭의 후위대 역시 강을 건넜고 이튿날 아침 비트겐슈타인의 군대가 접근해오자 에블레는 결국 다리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 우안에는 정규군은 더 이상 없었지만 부상자와 환자, 낙오병들과 비전투원들이 가득했고 다리 폭파 후 이들 대부분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양군을 막론하고 포로가 된 병사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는데 이는 가혹한 처분 외에도 실제로 많은 포로들을 부양하기가 어렵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러시아는 포로로 잡힌 병사가 소속된 나라가 러시아 편에 서는 대로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이 동안 쿠투조프의 본대는 전장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고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10. 원정의 끝


11월 말에 남은 정규군을 이끌고 베레지나 강을 건너 에움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나폴레옹은 12월 초 시달릴 대로 시달린 생존자들과 함께 빌뉴스에 도착했다. 적지를 거의 벗어났으므로 나폴레옹은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재건하고 불안정한 수도의 정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근위대를 뒤따라오게 하고 일부 측근들만 대동하여 즉시 파리로 떠났다. 총지휘권은 뮈라에게 인계했는데 나폴리 왕이기도 했던 뮈라는 12월 10일 빌뉴스를 포기하고 남은 군대와 함께 얼어붙은 네만 강을 되건너 바르샤바 공국으로 후퇴한 후 자신의 부재로 인해 왕국 내에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주고 나폴리로 떠나버렸다. 남아 있는 병사는 원정 직전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아 12월 14일 네만 강 서쪽에 도착한 뮈라의 보고에 따르면 겨우 5천여명만이 싸울 수 있는 상태였다.

마크도날이 이끄는 라트비아의 나폴레옹군은 12월 20일 철수를 시작했다. 12월 30일, 자국군과 함께 후위를 맡아야 했던 요르크는 마크도날 군대와의 연락이 끊어지자 리투아니아의 타우라게에서 러시아의 폰 디비치 소장과 비밀리에 정전에 합의하고 동프로이센으로 퇴각했다.

개전 후 슈바르첸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은 천천히 동북쪽으로 나아가 프리폐트 늪지대 남쪽에 다다른 후에는 교전을 회피하며 몇 달 동안 더 이상 내륙으로 전진하지 않고 있었는데 원정군 본대의 운명을 전해 듣고는 1813년 1월 초 전투를 중지하고 같은 달에 러시아와 무기한 정전 협정을 맺은 다음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러시아를 침공했던 원정군은 총퇴각했다.


11. 전후 영향


러시아군은 거의 붕괴한 원정군을 추격해 바르샤바 공국으로 침입했다. 러시아군은 원정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자력으로 대항할 만한 힘이 없어진 바르샤바 공국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 1813년 2월에는 바르샤바를 함락하고 5월까지 공국 거의 전체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프로이센은 대프랑스 동맹에 다시 참가해 징병제를 재도입하고 군비를 급속도로 증강하면서 3월 말에는 프랑스에 선전했다.

한편 파리로 되돌아온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수십만의 신병을 징집하고 엘베 강을 방어선으로 결정, 함부르크에는 수만 병력을 주둔시켜 다부가 지휘하게 하고 4월 말에는 바르샤바 공국 다음으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의 목표가 될 작센 왕국으로 대군을 이끌고 진입해 러시아, 프로이센군에 대항했다. 작센은 그때까지 중립을 표명하던 오스트리아와 인접해 있는 지방이기도 했는데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까지 전쟁을 걸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쇤브룬 조약에 의해 양도받았던 일리리아 지방을 반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나폴레옹과 직접 교섭하던 메테르니히는 라인 동맹의 해체와 18세기 말까지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이었던 이탈리아 북부도 요구했고 이에 따라 교섭은 결렬되고 7월부터 오스트리아 역시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갔다.

러시아 원정에서 당장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을 잃었고 그것은 라인 동맹 가입 국가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적으로 돌린 나폴레옹은 아주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포병과 기병이 거의 전멸한 것이 나폴레옹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 결국 나폴레옹이 5월 동안에 프로이센과 러시아군을 이기지 못하고 정전에 동의했다가 8월에 열세인 상태로 3국 동맹군과 싸워 패배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6월 말 웰링턴 후작이 지휘하는 7만여 명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연합군이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 왕이 되었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군대에 승리하고 프랑스의 전력이 거의 대부분 독일로 돌려지는 것에 힘입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추격, 툴루즈까지 육박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원정이 참담한 결과로 끝난 지 반년 만에 유럽 대륙에서의 나폴레옹의 패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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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cidity1986 2012.12.17 02:11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년~1936년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한 사건으로, 국제 연맹과 강대국들은 이를 눈감아 주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게 만들었다.



에티오피아 여성을 희롱하고 있는 이탈리아 군인(1936)


1. 배경

당시 에티오피아 라이베리아와 함께 1884년 유럽 열강들의 베를린 회담에서 살아남은 아프리카의 몇 안되는 독립 국가들 중 하나였다. 189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기 위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1896년 아두와 전투에서 참패로 끝났다.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국가주의 확장 정책을 펼치기 위한 구실을 찾던 중 1934년 12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접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삼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2. 과정


모든 중재 제의를 거부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은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빈약한 장비와 제대로된 훈련도 받지 못한 에티오피아군을 밀어붙쳐 1936년 4월 9일 아샹기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이 수도 아디스아바바까지 점령하자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국외로 망명하고 이탈리아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언하고 바돌리오를 총독으로 하는 괴뢰 정부인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을 수립했다.


3. 결과/영향


에티오피아의 호소로 국제연맹 1935년의 이탈리아의 침략을 비난하고 이탈리아에 경제제재를 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지지가 부족해 제재조치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국제 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던 이탈리아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국제 연맹에 탈퇴해버렸다. 동아프리카에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은 무솔리니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다른 주요강대국들은 무솔리니를 응징하는 데 실제적 관심이 없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국가주의자들의 세력진출 발판을 마련해줌으로써 국제적 긴장을 증대시켰고 곧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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