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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은 1997년 4월 3일 햄버거 가게 버거킹 이태원점에서 당시 홍익대학교의 학생인 조중필(당시 23세)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유력한 용의자로 당시 18세이던 미국인 두 명(패터슨,에드워드)을 검거, 재판 하였으나 용의자 두 명 중 한 명이 범인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두 명 모두 처벌하지 못하게 되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담당 검사의 과실로 용의자에 대한 출국 금지 연장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용의자 중 한 명인 패터슨이 미국으로 도주하여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현재 패터슨은 미국에서 구속된 상태이다.

 

1. 사건 개요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건 리(Edward Lee)와 혼혈 미국인 아더 패터슨(Arthur Patterson) 등 10대 남녀 20여명이 1997년 4월 3일 이태원의 한 건물 4층 술집에 모여서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배가 고파져 같은 건물 1층 패스트푸드점에 내려와서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혼혈 미국인 패터슨이 휴대용 칼(잭나이프)로 햄버거를 자르면서, 일행은 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후 일행이 밖으로 나가거나 4층 술집으로 돌아갔는데도, 패터슨과 패터슨의 친구인 미국 국적의 한국인 에드워드는 햄버거 가게 화장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우연히 화장실에서 마주친 조중필씨를 휴대용 칼로 9군데 찔러 살해했다. 이후 이들은 4층 술집 화장실로 가서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 패터슨은 미국 제8군 기지로 들어가 친구를 만나 바지를 갈아입고 피묻은 옷을 불에 태우고 범행에 사용한 칼을 버렸으나, 4월 4일 익명의 제보를 받은 범죄 수사대(CID)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4월 6일, 미국 출장을 다녀온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 패터슨이 TV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아들을 추궁했고, 아들이 범죄를 시인하자 변호사를 만난 후 4월 8일 검찰에 자수했다.

 

2. 사건 논란

 

18세에 불과한 청소년이 아무 이유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도 충격을 주었으나, 수사기관이 제대로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하면서 사건이 복잡해졌다. 수사기관에서 영어로 제대로 심문을 하지 못하면서 초기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잡힌 아더와 에드워드는 서로 상대방이 피해자를 살인했고 자신은 옆에 있기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SOFA협정으로 인해 용의자였던 미국인 두명과 관련된 사람에 대한 조사나 증인 신문에 차질이 있었다.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살인죄로, 아더는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고 흉기소지등으로 기소되었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1심에서는 에드워드의 살인혐의를 인정하였으나, 대법원에서는 에드워드에 대해 유죄라고 볼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죄라고 판결했다. 아더는 흉기 소지로 유죄가 확정된 뒤 항소를 포기하여 실형을 살다가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소하였다.

이런 와중에 법무부가 아더에 대한 출국금지 연장 조치를 취하지 않자, 출국금지기간 만료 사흘 만에 아더가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아더에 대한 신병확보 및 수사가 곤란해졌다. 이에 분노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했고 1심과 2심에서는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담당 검사의 과실과 유족들의 정신적 피해간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후 아더에 대한 기소를 유족들이 요구하였고,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영화가 개봉된 후 아더에 대한 재판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2009년 12월 15일 검찰은 법무부에 아더에 대한 범죄인 인도청구를 요구하였다. 이후 2011년 10월 아더가 미국 수사 당국에 구속된 상태라는 것이 알려졌다.

 

3. 사건 진행 상황

 

이태원 살인사건 이후 故 조중필씨의 어머니는 재수사 요구와 외국으로 도피한 유력 용의자 패터슨에 대해 출석을 요구했지만 법무부와 외교통상부 측에서는 줄곧 못 찾겠다는 답변을 할 뿐이고 사건은 지지부진해 왔다.

이후 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이 영화화되고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수차례 방송을 하는 등, 다시 사건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어 2011년 10월 10일 미국에 있는 유력 용의자 패터슨을 당국의 협조에 의해 검거하여 한국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되었다. 4개월전 패터슨은 미국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으며 패터슨에 대한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한국에서 달아난 범죄자 아더 패터슨의 송환문제에 관해, 구금을 승인하며, 보석은 허용치 않는다'라고 하였다.

 

아더는 다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온 이후 출국했는데,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인지 여부에 대해 법조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만약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외국에 있는 경우'라는 입증이 없는 경우 즉,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은 경우에는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15년인 2012년 4월 초까지이다.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 2011년 12월중에 아더 패터슨을 기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검찰은 2011년 12월 22일 아더 패터슨을 기소했다.

 

미국에서 송환 재판을 담당한 검사(미국 검사)는 둘이 공범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한국검찰은 수사 결과 둘이 공범이며, 패터슨이 직접 살인을 했고, 에드워드가 이를 지시한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에드워드를 다시 기소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2012년 10월 로스앤젤레스 연방법원은 패터슨을 한국으로 송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패터슨은 11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 인신보호청원을 제출해 송환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됐다. 현재 LA 다운타운 연방구치소에 구금돼 있다.

치과 의사 모녀 살인 사건은 대한민국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대한민국 법 체계와 낙후된 법의학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사형 제도의 존폐에 대한 논란까지 불러 일으킨 사건이다.

 

만 7년 8개월 동안 사형(1심, 1996년 2월) → 무죄(2심, 1996년 9월) →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대법원 상고심, 1998년 11월 13일) → 무죄(고법 파기 환송심, 2001년 2월) → 무죄(대법원 재상고심, 2003년 2월) 등으로 여러 차례 판결이 뒤집어졌다.

 

 

피고인 이도행 씨

 

 

1. 사건 개요

 

1995년 6월 12일 아침 서울특별시 불광동 모 아파트 ○○○씨 가족의 집에서 원인 모를 흰 연기가 새어나오자, 인근 주민이 바퀴벌레 약을 뿌리는 줄 알고 경비실에 항의했다. 경비원 조 모씨가 단지내 전화(인터폰)로 연락을 해도 대답이 없자, 오전 9시 7분경 철제 방범창을 뜯어내고 내부를 살폈다. 그제야 화재 때문에 연기가 발생했음을 발견한 경비원이 소방서에 신고하였고, 오전 9시 30분경에 도착한 소방관들은 10여 분 만에 불을 껐다.

 

소방관들은 현장을 살펴보다가 치과 의사였던 부인(당시 31세)과 딸(당시 2세)이 죽은 채로 욕조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이 발생한 날은 남편(당시 33세)이 개인 외과병원을 개원하는 날이었고, 당시에는 출근한 상태였다. 화재는 안방의 장롱에서 시작되었으며 장롱 등만 태웠을 뿐 크게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훗날 이 화재는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재판 과정

 

남편은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1995년 9월 2일 구속되었다. 검찰(담당검사:안원식,박상우) 측의 주장은 남편이 출근하기 전인 오전 7시 이전에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범행 시간 추정 등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시신을 물에 담근 다음, 서서히 불이 타도록 장롱에 불을 지르고 출근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남편이 출근한 오전 7시 이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목격자도 없고 지문, 혈흔 등 직접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결국 이 사건은 실제 사망 사건이 언제인지, 불은 언제 질렀는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단서들을 수집하는 초동 수사에 있어 많은 허점을 보였다. 일례로 발견 당시 사체와 욕조 물의 온도를 재는 기본적인 조사조차 시행하지 않아, 살해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놓치기도 했다.

 

결국 변호인단은 스위스법의학자 크롬페셔 교수를 증인으로 내세워 검찰에서 주장한 법의학적 자료는 증거 효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밝혔고, 모의 화재 실험에서도 화재가 오전 7시 이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였다. 결국 이런 정황들이 모두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남편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현재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한국판 OJ심슨 사건으로 회자되기도 했는데, 간접 증거와 정황 증거 등으로 볼 때 남편이 범인이라는 심증은 충분하지만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무죄로 풀려난 OJ심슨과 유사한 사건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사건 초기 법의학적인 증거 수집이 미흡하여 미해결 상태에 빠진 사례로 유명하다. 특히 언론에서도 냉정하게 사건을 접근하지 않고 '한국판 OJ 심슨 사건'이라며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은 결국 1996년 듀스 김성재 사망 사건과 같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수사가 필요함을 시사해 준 사례로 남게 되었다. 본 사건의 2심 재판부터 최종 대법원 재상고심 재판까지 변호를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한 남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8년간의 지루한 싸움은 승리로 끝났으나 '이것이 정말 승리일까? 남자는 정말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소회를 밝혔었다.

 

3. 무죄 용어에 대한 비판

 

'무죄(無罪)'의 의미가 '죄가 없음'으로 인해 용어의 부적절성을 지적한다. 증거재판주의 제도 아래에서는 수사 중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변호인들의 증거 무효성 주장에 대해 검사가 이를 방어하지 못하면 '무죄'의 판결이 성립된다. OJ심슨 사건이나 이번 사건처럼 심증적으로 살인의 동기가 충분하고 정황상 명백하더라도, 미숙한 대처로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증거의 유효성 입증에 실패하면 '죄가 없음'이 되는 것인 바, 이는 단지 '유효한 물증이 없어서 형벌을 논할 수 없는 것' 뿐이지 이미 사망한 피살자 외에는 그 누구도 '진실'을 판단할 수 없음에도 '무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은 실제적 진실을 바탕으로 결백을 인정한 판결로 오해할 소지가 계속 남아 있다. 실제로도 대법원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확정된 살인 사건이 나중에 실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 <- 출처 필요..

아키하바라 살인 사건(2008)

其他 關心事/事件事故 2013.05.09 22:01 Posted by Lucidity1986

아키하바라 살인 사건 (일본어: 秋葉原通り魔事件 아키하바라토오리마지켄, 아키하바라 괴한 사건)은 2008년 6월 8일 일본 도쿄 도 지요다 구아키하바라에서 발생한 무차별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1. 사건 개요

 

2008년 6월 8일 12시 30분, 도쿄 도 지요다 구 소토칸다 지역의 교차로에서, 2톤 트럭 차량 한대가 신호를 위반하고 돌진하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5명의 보행자를 들이받았다.

그 뒤 이 트럭은 교차로를 지나 맞은편 차선에서 신호대기하고 있던 택시와 접촉사고를 내고 정차하였다. 트럭을 운전하고 있던 용의자는 차에서 내려 다친 보행자에게로 접근하고 있던 행인과 경찰관 14명을 소지하고 있던 등산 나이프로 연달아 찔렀고, 사건 발생 5분 후, 만세이바시 경찰서 아키하바라 파출소로부터 출동한 경찰관이 용의자를 추적해 경봉으로 대응한 뒤, 마지막에는 권총으로 남자를 제압하였다.

 

사건 당일은 일요일 오후시간 대로, 보행자 천국(차 없는 거리)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며 관광 및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사건 직후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하거나, 일부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하였고, 부상자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등 사건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12시 36분 최초로 신고를 받은 도쿄 소방청은 일반적인 교통사고로 보고 구급대와 소방대 각각 1대씩 출동시켰으나, 신고가 잇따르자 지휘대 1대와 구급대 4대를 더 출동시켰다. 12시 43분에 최초 구급대(아사쿠사 소방서 아사쿠사바시 출장소)가 도착했지만, 통상적인 대처로는 무리라고 판단, 재해파견 의료팀(DMAT)를 출동시켜 구조를 진행시켰다.

 

이 사건은 무차별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되어 일본 역대 최악의 참사라고 불릴 만큼, 일본 사회를 충격속으로 몰아넣었다. 사건 당시 시행중이던 보행자 천국은 그 뒤로 무기한 중지되었으나, 2011년 1월 23일 보안설비와 경비인력을 대폭 강화하여 다시 재개되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용의자는 가토 도모히로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 였으며, 얼마전까지 생활고에 시달렸던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생활에 지쳤다. 세상이 싫어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아키하바라에 왔다. 누구라도 좋았다”며 범행동기를 진술하였다. 당시 사고를 당한 보행자들은 보행자 천국(차 없는 거리)으로 도로가 통제되길 기다렸다가 통제된 이후 교차로에 진입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등산 나이프에 찔려 사망한 무토 마이는 근처 편의점 앞 휴대폰 가판 아르바이트 도중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구하려고 나왔다가 변을 당한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2011년 2월 2ch 인터넷 게시판에서, 2011년 2월 11일 신주쿠 역 신남쪽출구(新南口)에서 3명이 무차별살인을 저지르겠다는 글이 올라와 한차례 물의를 빚었다. 해당 글을 올린 범인은 15세 중학생으로 "얼마나 떠들어댈지 보고 싶었다"며 범행동기를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2. 피살자 명단

 

  1. 나카무라 가쓰히코(中村勝彦, 당시 74세, 전직 의사)
  2. 고이와 가즈히로(小岩和弘, 당시 47세, 회사원)
  3. 마쓰이 미쓰루(松井満, 당시 33세, 요리사)
  4. 미야모토 나오키(宮本直樹, 당시 31세, 회사원)
  5. 무토 마이(武藤舞, 당시 21세, 대학생)
  6. 후지노 가즈노리(藤野和倫, 당시 19세, 대학생)
  7. 가와구치 다카히로(川口隆裕, 당시 19세, 대학생)

3. 재판과 집행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가토는 '세상이 싫어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시즈오카에서 아키하바라까지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아키하바라를 몇 차례 사전 답사도 했다고 한다. 가토는 비정규직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을 무선 인터넷을 통해 표시해 왔으며, 조사 중 '센다이와 쓰치우라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쓰치우라의 사건'은 2008년 3월에 가나가와 마사히로가 일으킨 도리마 사건을 가리키며, '센다이의 사건'은 2005년 4월 2일오토모 세이지가 일으킨 차량 폭주 사건을 가리킨다. 실제로 가나가와는 가토가 자신의 범행을 본따 칼을 흉기로 사용하였음을 기뻐하기도 했다.

 

2010년 1월 28일, 도쿄 지방법원에서 무라야마 히로아키 재판장(村山浩昭)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가토는 체포 당시의 당당하고 담담히 경찰 조사를 받던 태도에서 반성, 사과하는 모습으로 변화된 태도를 보였다. 3월 9일 열린 네번째 공판에서는 최초로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증인심문이 이루어졌고, 피해자들은 가토에 대한 사형 선고를 강하게 요구했다.

 

7월 27일 열린 제16차 공판에서 가토는 범행의 동기에 대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고 싶었다고 술회하며 그 배경에는 굴욕적이기까지 한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이 있었다고 밝히며 실제의 사례를 소개했다. 공판에 앞서 비공개로 열렸던 가토의 부모에 대한 심문에서 가토의 어머니는 해당 사례들을 인정했고, 아버지는 이에 대해 자신은 자식 교육에 대해 관여할 수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2011년 3월 24일, 도쿄 지방법원은 가토 도모히로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항소했으나 2012년 9월 12일 2심인 도쿄고등법원 재판부 역시 사형을 판결했다. 동해 9월 25일 가토 도모히로의 변호인은 정신 장애를 이유로 상고했다.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사건은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하던 이동식(李東植, 당시 42세)이 단골 이발소에서 만나 애인이 된 여성 면도사를 상대로 죽어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 독극물로 살해한 사건이다.




1. 사건 개요

사건은 1982 12월 14일에 발생했다.

이동식은 당시 애인이던 피해자를 로구(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한 호암산으로 데리고 가서 사진 촬영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건네 줄 감기약에 독극물인 청산가리를 주입했다. 

그리고 그 감기약을 애인에게 건네 주면서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고 권했고, 그 약을 먹은 피해자는 사진 촬영 중 고통스럽게 죽어가기에 이르렀다. 

범인 이동식은 아무 죄의식도 없이 피해자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부터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무려 21장의 사진에 담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숨진 피해자의 시신은 낙엽 등으로 묻혔고, 며칠이 지난 후 범행 장소에서 병정 놀이와 총싸움을 하던 동네 어린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건을 접한 서울특별시 남부경찰서(지금의 금천경찰서)는 피해자의 부검과 인맥 관계도 조사 등을 통하여 범인 이동식의 존재를 파악하였으며, 밀착 수사 및 집안 수색을 통해 범인으로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범인의 집 지하 보일러실 벽 속에서 필름과 노트가 발견되었고, 이들이 모두 결정적인 증거물로 확보되었다. 범행을 극구 부인하던 이동식은 사진 감정을 했던 전문가의 의견 한 마디에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2. 범행 과정


어려서부터 불우한 가정 환경과 잦은 학교폭력 등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자란 범인 이동식은 수 건의 범죄 행각으로 이미 전과 3범이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 범인 이동식은 우연히 사진을 접하게 되면서 적극적인 사진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한때 사진전에서 은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빛을 보았다.

하지만 머지 않아 특별한 주제를 찾지 못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던 범인 이동식은 결국 누드 모델 촬영을 감행하는 데 이르렀고, 평소 자주 드나들던 이발소에서 피해자를 만나게 된다. 당시 피해자는 이발소 면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얼마 후 이동식은 피해자로 하여금 누드 모델을 통해 출세시켜 주겠다는 말을 건넸고, 피해자도 이에 응하면서 사진 촬영 활동을 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둘은 점점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범인 이동식은 주변의 의혹과 피해자와의 염문설 등으로 골머리를 앓아 오던 중 급기야 내연 관계로 발전한 피해자(여자 면도사)를 살해하기로 작정한다.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애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출품하려는 심사에서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되었다.


3. 범행 여파


비정상적인 인격과 지나친 집착에서 비롯된 이 비극적인 사건은 전국을 분노와 경악에 빠뜨렸다. 

구속 기소된 이동식은 1심에서 사형 선고 후 항소했으나 고등법원에서도 사형선고는 이어졌고, 결국 상고가 기각되어 1984년 2월 16일 사형이 확정 판결되었으며, 2년이 지난 1986년 5월 27일 서울구치소(지금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11년이 지난 1997년 8월, MBC 경찰청사람들-죽음의 미학 편》의 소재로 채택되어 방영되었으며, 2012년 1월에는 MBC 《서프라이즈》에 당시의 사건 담당 형사와 사진 감정 전문가가 출연한 ‘진실인 사건’으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4. 추가 논란


옛 부인까지 살해당했을 거라는 의문을 제기한 전처의 유족들의 뜻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동반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뚜렷한 증거 및 정황이 포착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동구(지금의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했었던 피해자가 근무한 이발소는 여성 종사자들에게도 속옷을 착용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심한 퇴폐 이발소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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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집행 소식

최영오 일병 사건(1962)

其他 關心事/事件事故 2013.03.11 23:58 Posted by Lucidity1986

최영오(崔永吾, 1938년 ~ 1963년 3월 18일) 일병 사건은 1962년 7월 8일 오전 8시, 현역 일병 최영오가 주둔 부대 내에서 선임병사 2명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이다.


1. 사건 발단

최영오에게 도착한 애인의 편지를 선임병이 먼저 가로채 뜯어본 후 최영오를 조롱하자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다가 도리어 선임병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최영오는 결국 선임병 2명을 총살하기에 이르렀다.


2. 사회 이슈 및 여파

서울대 천문기상학과를 다니다 휴학하고 단기 학보병 신분으로 입대한 최영오는 명문대생이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군사법원은 최영오에게 사형 판결을 하였다. 

각계 각층에서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요즘 같으면 모르겠지만 당시는 5.16 직후로 대한민국에서 군부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 당연히 군사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963년 3월 18일 오후 2시 40분, 서울 근교 수색의 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집안은 1987년 8월까지 용공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힘으로 사회로부터 격리 조치되었다.

처형 직전 그는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관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최영오 일병의 사체 인수 통지서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그날 밤 11시 50분 쯤 서울 마포 근처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푸른별 아래 잠들게 하라'라는 영화도 제작 되었다.


관련 늬우스

두 상사를 사살(62년 7월 29일)

최영오 일병에 대한 구명 운동(62년 8월 2일)

최영오 군에게 사형 선고(62년 8월 4일)

항소제기 하였으나 기각, 사형 선고(62년 10월 19일)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62년 11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63년 3월 1일)

총살형으로 사형 집행(63년 3월 19일)

어머니의 투신(63년 3월 19일)

우순경 사건(1982)

其他 關心事/事件事故 2013.03.11 23:55 Posted by Lucidity1986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禹範坤巡警 銃器亂射事件)은 1982년 4월 26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에서 당시 계급이 순경이었던 경찰관 우범곤이 저지른 총기 살인 사건이다.


1. 원인


해병대 특등사수 출신이었던 순경 우범곤(1955년 11월 5일 ~ 1982년 4월 27일)은 1981년 4월부터 1982년 2월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지만, 인사 과정에서 탈락하여 1982년 3월 의령군으로 좌천되었고, 

동거녀 전말순(당시 25세)과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나빴던 우범곤이 동거녀와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 상태에서 우발적인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지었다.


2. 경과


1982년 4월 26일 오후 7시 30분경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7발을 들고 나왔다. 

우범곤은 우선 우체국에서 일하던 집배원과 전화교환원을 살해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킨 후, 궁류면 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자정이 지나자 우범곤은 총기 난사를 멈추고 평촌리 주민 서인수의 집에 들어가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4월 27일 새벽 5시경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 사건으로 주민 62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으며,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 결과


이 사건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서정화가 자진 사임하고, 후임으로 노태우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 당시 근무지를 이탈했던 의령서장 등 3명의 경찰관과 방위병 3명이 구속됐다.

한편 당시 의령경찰서장은 직무유기죄로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주관적으로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이 없고 객관적으로는 직무 또는 직장을 벗어나는 행위가 없다고 보고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당시 수사본부는 범인 우범곤의 수법이 너무 잔인해 일반인과 뇌조직이 어떻게 다른지를 가려내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시신을 보내 뇌세포 검사를 하려 했으나 검사가 불가능해 이를 포기했다.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우범곤 사건이 '짧은 시간에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인 단독 살인범'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으나, 세계 기네스북 협회에서는 연쇄살인이나 대량살인에 대한 기록은 등재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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